제목 | 28 사순 제1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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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2-27 | 조회수60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나의 말은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리라.> -. 나의 말은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리라. 복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주해 7절 바알 신의 제관들이 바친 기도. 우리나라 굿판에서 무당들이 주워섬기는 기도는 몹시 수다스럽다. 내팔 절간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담긴 원통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신도들이 예불하러 와서는 기도물래들을 빙빙 돌린다. 한 번 돌릴 때마다 원통들 속에 적혀있는 무수한 기도를 다 바친 셈이라 한다. 기도 때 수다를 떠는 까닭은 하느님을 성가시게 해서라도 소원을 이루겠다는 것이요(7절). 하느님이 우리의 소원들을 모르고 계실세라 가르쳐 드려야겠다는 것이다(8절). 8절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계시니 청원기도를 드리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친히 찬양과 감사 기도를 바쳤을 뿐 아니라 게쎄마니에서 청원기도를 드리셨다. 예수님의 저 감동적인 청원기도를 본받아, 우리가 청원기도를 바칠 때도 자기 뜻을 관철하겠다는 생각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주님의 기도 주기도문은 두 가지 형태로 전해온다. 루카 11,2-4에는 짧은 형태의 기도문이 마태 6,0-13과 디다케 8,2에는 긴 형태의 기도문이 있다. 루카와 마태오 모두 주기도문을 어록에서 옮겨썼다. 루카는 마태오 모두 주기도문을 어록에서 옮겨썼다. 루카는 어록의 기도문 분량을 비교적 그대로 옮겼고 마태오는 많이 보탰다. 주요한 가필 세가지를 지적하면, 아버지 호칭 앞에 붙인 수식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청원. “또한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청원이다. 마태오에 수록된 주기도문에는 일곱 가지 청원이 들어 있다.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 등 하느님에 관한 세 가지 청원에 이어 우리의 빵, 우리의 빛, 우리의 유혹, 우리의 악 등 우리 삶에 관한 네 가지 청원이 나온다. 청원들의 순서만 눈여겨봐도 주기도문의 기본성격이 드러난다. 하느님의 거느리심 아래서 우리의 삶을 꾸려가도록 해주십사 하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장차 드러나게 오실 하느님을 고대하고 이미 은밀하게 오신 하느님을 받들어 섬김으로써 나날의 어려움을 감당하게 해주십사 하고 비는 것이다. 9절 루카 11.2에서는 단순히 “아버지”라고 부른다. 마태오는 그 앞에다 “하늘에 계신 우리”라는 수식어를 덧붙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한다. 마태오의 호칭이 당시 유다교 문헌에 자주 나타난다. 당대 유다교인들이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른 사례도 더러 있고, “우리 아버지”라 부른 사례는 매우 흔하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아람어로 아빠라고 부르셨다(마르14.36). 예수님의 영향을 받아 사도 바오로와 그가 설립한 여러 교회 교우들도 하느님을 감히 아빠라 불렀다. 루카 11.2 그리스 역문에서는 하느님을 점잖게 “아버지”라고 하지만, 예수 친히 제자들에게 아람어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때는 아빠라 하셨을 것이다. 아빠는 본디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었으므로 아이말이다. 부자지간에 정이 두터우면 아이가 어른이 되고서도 아버지를 보고 아빠라 하는 수가 있었으니 가족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빠는 매우 정다운 호칭이다. 예수님, 제자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아빠라 부른 이면에는 자기네야말로 하느님 아빠의 귀여운 아이들이라는 자아의식이 깔려 있다. 유다인들은 예나 이제나 절대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불경스럽다는 것이다. 오늘날 구미 여성신학계에서는 성서의 가부장적 표현에 반기를 들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대신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어버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유다교, 그리스도교,이슬람보다 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힌두교가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당시 유다교인들이 바치던 카디쉬 기도문에도 같은 뜻의 청원이 나온다. “그분이 지으신 세상에서 그분의 크신 이름이 높이 되고 거룩하게 되소서.” 첫째 청원의 뜻을 새기면, 하느님 아빠의 거룩한 이름이, 곧 아빠의 거룩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빈다. 지금 꼭꼭 숨어 계신 하느님의 거룩한 모습이 어떻게 해서 환히 드러날 수 있을까? 하느님의 나라가 오면 그렇게 된다. 10절 주님의 기도에서는 하느님의 종말 통치가 되도록 빨리 실현될 것을 기원한다. 하느님, 어서 종말 통치가 되도록 빨리 실현될 것을 기원한다. 하느님, 어서 빨리 임금님으로 오시어 세상을 다스리소서. 카디쉬 기도문에도 같은 뜻의 청원이 있다. “그대들의 생존시에, 그대들의 날들에, 이스라엘 집안 생존시에 어서 빨리 가까운 시기에 임께서는 임의 나라를 세우소서.” 6.10ㄴ은 마태오의 가필이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보면 두 가지로 대별된다. 우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있다. 구체적 사례로 산상설교에 나오는, 예수님의 율법해석을 들 수 있다. 구체적 사례로 산상설교에 나오는, 예수님의 율법해석을 들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있다. 그럼 마태 6.10에 있는 “아버지의 뜻”은 무슨 뜻인가? 앞 문맥과 연결시켜 풀이해 보면, 하느님의 나라가 와서 땅에서도 당신의 구원의지를 이루시기를 비는 청원이겠다. 그러니까 10절에 있는 하느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의지요 부차적으로 하느님의 윤리의지라 하겠다. 어쨌든 마태오에 따르면 하느님의 뜻은 종말에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이루어진다. 게쎄마니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보라. 11절 여기서 “일용할”이라고 옮긴 그리스어 형용사 에피우시오스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낱말이라 그 뜻을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어원을 따져 본다면 “생존 필수적”이란 뜻이 들어 있다. “생존 필수적”을 의역한다면 “필요한”, “오늘 필요한”, “일용할”이 된다. 실제로 시리아 역본에서 이렇게 번역했다. 그닐카 교수가 지지하는 설로서 가장 설득력이 있다. 어원 분석 결과 또 한가지 가능한 번역이 있는데, 곧 에피우시오스를 “내일”로 옮길 수 있다. 이같이 번역하면 넷째 청원은 이렇게 된다. “우리의 내일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 모레 글피 빵까지는 구하지 않지만 내일 빵만은 마련해 주십사는 것이다. 히에로니무스 교부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실제로 히브리 복음에서는 히브리어로 마태 6.11을 그렇게 썼다 한다. 룻즈 교수가 지지하는 설이다. “내일”을 오늘과 모레 사이의 하루로 알아들을 수도 있지만, “미래”로 알아들을 수도 있다. 미래라도 보통 미래가 아니라 엄청나게 큰 미래, 곧 종말 미래로 풀이하는 설이 있는데 이 설에 따라 넷째 청원 의역하면 이렇다. “우리의 종말 미래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 이는 종말을 몹시 재촉하는 청원이다. 예레미아스 교수와 브라운 교수의 설이다. 12절 빚은 죄를 가리키는 상징적 낱말이다. 실제로 예수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에서는 호바가 빚과 죄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만 하느님에게서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은 14-15절과 5,23-24에도 선명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먼저 하느님의 자비 지극한 용서를 체험해야만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아량이 생길 수 있다(18,23-35). 13절 어떤 유혹?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이 예수께 배워 나날이 바친 제자들의 기도라는 사실에 유념한다면, 여섯째 청원의 유혹은 제자됨을 포기하려는 유혹이겠다. 게쎄마니에서 “여러분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라고 하신 말씀도, 깨어 기도해야만, 예수님을 버리고 제자됨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는 뜻이다. 일곱째 청도는 마태오의 가필이다,. “악”의 그리스 원어를 중성으로 보면 “악에서 구하소서”가 되고, 남성으로 보면 “악한 자에게서 구하소서”가 된다. 아마도 후자가 옳을 것이다. 용서하면 용서받는다 마태오는 12절에 있는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코자, 용서하면 용서받는다는 단절어를 여기 배치했다. 이 단절어의 변체가 마르 11,25에 실려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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