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1 사순 제4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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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3-20 | 조회수34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파스카 성야 세례 서약 갱신 후 따름 노래).> 4 그가 또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무릎까지 찼다. 7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때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파스카 성야 세례 갱신 후 따름 노래) 복음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주해 안식일에 베짜타 못에서 이루어진 중풍병자 치유 이 대목은 공관복음에도 나오는 중풍병자 치유사화를 안식일 논쟁사화와 더불어 확대보도한다. 이 두 사화가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는 설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치유행위가 이른바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와 유다인들의 충돌로 발전된다. 특히 예수가 안식일법을 위반한 것으로 보도하는 대목이 구조상 예수의 치유행위와 안식일 논쟁을 연걸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흡사한 구조를 태생소경 치유사화에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저자의 그리스도론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절 일반적으로 오순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긴다, 7장에서 초막절이, 10장에서 성전 봉헌절이,11-12장에서 예수의 마지막 해방절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축제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것은 축제보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예수 자신의 계시 말씀과 행적에 더 역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 동기를 시사하는 뜻에서 “유다인들의 축제”까 언급된 듯하다. 2절 ‘양의 문’이란 예루살렘 성전 북쪽 성문. 어떤 사본에는 “베테스다”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쿰란 문헌에 의거하여 이 명칭에 신빙성을 두기도 한다. 또한 베싸타가 히브리어보다는 아람어에 따른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4절 일부 사본에는 3절의 상황설명이 추가되어 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주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출렁거리게 했는데, 물이 출렁거린 다음 맨 먼저 들어가는 이는 어떤 병이든지 낫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진 일종의 민간신앙에 따른 설명으로 여겨진다. 못에 새로운 물이 갑자기 흘러들어솨서 물이 출렁거렸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5절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38년간 헤멘 방랑생활과 관련지어 상징적인 뜻으로 해석하려는 학자들도 있으나, 오래된 고질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예수의 치유행위가 놀라운 기적임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6절 ”본다“는 예수의 의도적 행동을,” 안다“는 예수의 신적 능력을 가리킨다. 예수의 물음은 치유이적을 염두에 둔 의사표명이다. 예수의 주도권이 시사된다. 7절 예수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반응이다. 병자는 예수가 자기를 재빨리 들어다가 못에 넣어 주겠다는 줄로 알아들었다. ”주님“은 신앙고백의 의미가 아니라 ”선생님“에 가까운 존칭이다. 8절 공관복음의 중풍병자 치유사화에서 언급된 예수의 권위적 말씀과 거의 같은 표현이다. 9절 예수의 권위게 의해 치유가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가리킨다. 특히 ”즉시“란 표현은 오로지 예수의 말 한 마디로 치유되었음을 강조한다. 본문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침상을 들고서 걸어갔다“라는 표현에 병자가 중풍병자였음도 시사된 셈이다(마르 2,11-12 참조). 10절 유다인들은 치유된 자가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을 안식일 금지조항 가운데 하나로 본다. 11절 치유된 자는 자신을 고쳐춘 분의 권위를 내세우는 듯하다. 단순히 책임전가만 뜻하지는 않는다. 12절 이름을 몰랐다는 뜻이다. 13절 사람들이 많이 분벼서 빠져나갔다는 뜻이다(6.15 참조). 14절 예수의 이 경고는 죄가 병을 일으킨다는 당시 유다인들의 생각을 전제한다. 그러나 예수는 치유뿐 아니라 죄의 용서까지도 알리고자 한다. 또한 이 말은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시사한다. 즉,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치유가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 구원행위의 외적 표징으로 시사된다, 따라서 “더욱 나쁜 것”은 죄의 벌로서 육체적 죽음이나 영원한 멸망을 뜻한다. 한마디로 ”생명“을 잃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더욱 나쁜 것”은 문맥상 ”이보다 더 큰 일”에 상반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15절 치유된 자의 밀고로 인해 예수와 유다인들의 논쟁이 야기되었음을 시사한다. 치유된 자의 배은망덕도 시사된다고 볼 수 있다. 16절 유다인들이 예수를 박해한 원인은 안식일에 행한 예수의 치유기적 자체보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 있다. 원문에서 반과거형으로 표현된 “박해했다”와 “택했다”가 이런 의미를 잘 시사한다. “그런 것”이란 표현도 안식일을 어기는 일체의 행위를 가리킨다. 물론 현 문맥에서는 치유된 자로 하여금 안식일에 침상을 들고 걸어가게 한 예수의 책임도 내포된다. 17절 예수 자신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 안식일에도 일하시니 자신도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일치하여 일할 따름이라고 대응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하여 함께 일한다는 계시 말씀은 19절에서도 거듭된다. 하느님과 동등한 예수의 정체 곧 안식일 법을 능가하는 예수의 정체가 시사된다. 예수의 이 방어는 안식일법에 대한 당시 유다인들의 사고를 배경으로 할 분, 모세의 법에 상치되는 언급은 아니다. 18절 원문에 따르면 예수를 죽이려는 유다인들의 원의가 지속적이었음을 뜻한다. 유다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이유가 안식일법 위반뿐 아니라 독성죄로 언급된다. 신성모독의 예수를 죽이게된 결정적 이유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모두 언급된다. 예수의 안식일법 위반은 구체적 행동이 아니라 유다인들의 안식일법에 대한 예수의 근본적 태도를 가리킨다. 예수를 죽이고자 나선 유다인들의 근본 이유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과 동등함을 자처하는 데 있다. 이것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전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에 대한 당시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대립상이 다소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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