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2 사순 제4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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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3-21 | 조회수393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복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주해 17절 유다인들이 예수를 박해한 원인은 안식일에 행한 예수의 치유기적 자체보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 있다. 원문에서 반과거형으로 표현된 “박해했다”와 “행했다”가 이런 의미를 잘 시사한다. “그런 것”이란 표현도 안식일을 어기는 일체의 행위를 가리킨다. 물론 현 문맥에서는 치유된 자로 하여금 안식일에 침상을 들고 걸어가게 한 예수의 책임도 내포된다. 18절 예수 자신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 안식일에도 일하시니 자신도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일치하여 일할 따름이라고 대응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하여 함께 일한다는 계시 말씀은 19절에서도 거듭된다. 하느님과 동등한 예수의 정체, 곧 안식일 법을 능가하는 예수의 정체가 시사된다. 예수의 이 방어는 법에 대한 당시 유다이들의 사고를 배경으로 할 뿐, 모세의 말에 상치되는 언급은 아니다, 19절 원문에 따르면, 예수를 죽이려는 유다인들의 원의적 지속적이었음을 뜻한다. 유다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이유가 안식일법 위반뿐 아니라 독성죄로 언급된다. 신성모독이 예수를 죽이게된 결정된 이유로 공관복음과 요한 복음에서 모두 언급된다. 예수의 안식일법 위반은 구체적 행동이 아니라 유다인들의 안식일법에 대한 예수의 근본적 태도를 가리킨다. 예수를 죽이고자 나선 유다인들의 근본 이유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과 동등함을 자처하는 데 있다. 이것은 예수르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전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에 대한 당시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대립성이 다소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들의 권한 이 대목에서는 예수의 자기계시 전층을 토대로 저자의 깊은 신학사상이 반영된다. 이 졔시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하여 함께 일한다는 말로 시작되고 끝맺는다. 이미 17절에서 간단히 예시된, “아버지”와 “아들”의 이 결속관계가 이 대목의 주제다. 표현상 19-23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관계가 객관적 문제로 언급되고, 17-19절에서는 서술어가 “하느님의 아들”에서 “사람의 아들”이 상호관계가 객관적 문제로 언급되고,27-29절에서는 서술어가 “하느님의 아들”에서 “사람의 아들”로, 종말론적 관심도 현재에서 미래로 바뀌는 것이 두드러진다. 적어도 이 두 대목은 전승자료에 근거한 것 같다. 내용상 “아들”로서 예수의 자기계시가 하느님께 대한 예수 자신의 태도에서 신학적으로 밝혀진다. 이역시 예수의 계시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시 전제를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 그리고 “아들”안에서 하느님의 구원과 심판이 원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관점아래 종말론적 미래가 현제적으로 언급된다. 이른바 “아들 그리스도론”에 따라 “현재적 종말론”이 언급된다. 그리스도론과 종말론이 내적으로 결합된 점이 특징이다. 19절 “아들”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일종의 그리스도론적 칭호다. 이런 의미로 요한복음에서는 18회 정도 언급되는데, 그 가운데 8회가 19-26절에 나온다. “아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란 말은 예수의 계시 말씀과 유다인들에게 대답한 말 가운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은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기인하며, 예수 자신은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여 함께 일할 뿐임을 뜻한다. 특히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본다”란 말은 아들의 계시 말씀과 행동이 아버지와 일치된 인격안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하느님과 예수의 깊은 결속관계가 “아들” 개념으로 설명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한다는 것이 “똑같이 한다”란 말로 더욱 강조된다. 이 말은 “동시에 함께 한다”는 뜻으로 아버지와 동일한 권한이 아들에게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 구절은 17절과 같은 내용이고, 21-22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와같이 19절의 계시 말씀은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구원행위를 구체적으로 펼치신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20절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한다는 것이 “똑같이 한다”란 말로 더욱 강조된다. 이 말은 “동시에 함께 한다”는 뜻으로 아버지와 동일한 권한이 아들에게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 구절은 17절과 같은 내용이고 21-22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이와같이 19절의 계시 말씀은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구원행위를 펼치신다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그 충만한 사랑으로 당신 친히 하시는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써 가능하다는 뜻이다. 특히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요한복음에서 아가판이란 동사와 함께 언급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필레인 동사로 표현된다. 아마도 인자적 사랑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여준자”란 말은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본다”란 말에 상응한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아들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충동과 힘을 준다는 것을 뜻한다. 21절 “죽은 이들을 일으키어 살게 하시는 것”은 “심판하는 것”과 함께 아버지께 유보된 것으로 명시된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자 한 “이 보다 더 큰 일”이다. “그렇게 ”로써 아버지께 유보된 일은 아들도 행할 수 있고, 아버지와 동일한 권한이 아들에게 주어져 있음이 강조된다. “자기가 원하는”이란 표현도 아들의 임의가 아니라 권위나 권한을 뜻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만을 실행하기 때문이다. 22절 21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로서 아버지는 당신이 직접 심판하지 않고 아들에게 그 권한을 주신다는 내용이다. 예수 자신이 하느님과 동일한 품위와 그런 최고의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계시한다. 23절 문법상 22절에 직결되나 내용상 21절과도 관련지어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권한 행사에 참여하여 당신 자신처럼 아들도 모든 사람이 공경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아들 공경이 곧 아버지 공점임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다는 말로 더욱 명시된다. 파견된 분 안에서 파견하신 분을 공경한다. 따라서 하느님 공정은 그리스도 공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24절 사람들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듣게 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은 자들을 살리는 능력을 주셨으므로 아들의 말은 그를 얻는 자를 뜻한다. 예수의 계시 말씀은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힘이 있다. “듣는다”란 믿음을 가지고서 들음이고 “믿는다”란 아들의 말을 들음으로써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께 신뢰함이다. 심판에 예속됨은 생명에서 벗어난 죽음은, 부활은 심판에서 빠져나옴이다. 아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은 그것은 하느님의 생명에 새로운 실존으로 참여한 변혁이 이루어진 삶이다. 25절 죽은 자들을 일으켜 생명을 줄 때가 온다는 것은 약속이요 그 때가 이미 왔다는 것은 그 약속의 성취다. 이 구절은 24절과 함께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24절의 계시 말씀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언급된다. 죽은 자들을 일으켜 생명을 주는 아들의 목소리를 지금 실재로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는 때가 이미 온 셈이다. 모든 사람이 단죄된 분노의 심판 또는 죽음의 운명에 놓이는 심판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죽은 자들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종말에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이 현재의 사건으로 언급된다, “듣는다”란 말이 믿음으로 쟁취한다는 뜻으로 그 역할이 밝혀진다. 비록 죽는 자들도 아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지만 오로지 듣는 자, 곧 계시자의 목소리를 믿음으로 청취하는 자만이 생명을 얻는다. 믿음으로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 곧 아들의 계시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26절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가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을 가진 이유가 설명된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생명을 가지고 있고, 또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미 21절에서도 언급되었고, 여기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될 뿐이다. 아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생명으로 무장되어 파견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 “말씀”안에 “생명”이 있듯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19-20절에서 언급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시사하고 이 관계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말씀”이 가지는 바로 그런 관계를 뜻한다. 따라서 아들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원천이다. 27절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는 다니 7.13과 관련되나, 심판자로서의 “사람의 아들”은 오히려 초대 그리스도교의 전승자료, 특히 공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유래한다. 세상을 구원하러 온 예수가 “사람의 아들”로서 심판을 하게 된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라는 뜻이다. 당시 유다인들의 사고를 반영한 말로서 육신 부활을 전재할 뿐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죽은 자들의 부활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속한다. 현재적 관점으로 언급된 25절과 비교할 때, 이 구절은 “하느님의 아들의 목소리” 대신 “사람의 아들의 목소리”로 “때가 이미 왔다” 대신 “때가 온다”라 말로써 미래적 관점에서 달리 언급된다. 이 언급은 뜨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확신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종말심판은 “사람의 아들” 또는 “주님으로서 예수가 하게 될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초대 그리스도교의 전승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0절 19절을 일인칭 형태로 바꾸어 간략하게 반복한다. 예수의 심판은 파견한 하느님으로부터 연유하므로 불가침이며 반드시 유효하고 진실하다는 뜻이다. 즉, 예수의 심판하는 일이 현재적이든 미래적이든 하느님의 권위에 근거한 것으로 강조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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