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6 사순 제5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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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3-25 | 조회수34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주교회의의 판단에 따라, 이 주일부터 성당에 있는 십자가와 성화 상들을 가리는 관습을 보존할 수 있다(한국 교구들에서는 이 관습을 보존할 수 있다.). 십자가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거행을 마칠 때까지 가려 둔다. 성화 상들은 파스카 성야 예식을 시작할 때까지 가려 둔다. 파스카 성야에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받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세례 준비로 셋째 수련식을 이 주일에 거행한다. 이 수련식에서는 고유 기도문과 고유 전구를 사용한다.> 제1독서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리겠다.> -.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리겠다. 제2독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십니다.> 11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주해 8절 “육 안에 있는 자들”은 “육을 따르는 자들”로서 죄의 지배를 받는 자들을 가리킨다. 9절 세례받은 이는 영 안에 즉 생명의 영역에 산다. 그리스도께 속하기 위해 그분의 영적 힘에 예속되어야 한다. 9절에서 “영”, “하느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번갈아 나온다. 이 두 경우는 같은 영을 지칭한다. 10절 그리스도와 신장의 일치는 세례를 통해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지고 그분의 영에 순응하는 생활에서 구현된다. 6,21-23 참조. “육”과 “영”이 10절에서 대조된 것은 영이 사람의 영적 기능을 뜻한다고 여길 수 있게 한다. 사람의 영은 죄 때문에 시체와 같이 된 몸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영의 힘으로 생명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과 부활로 창조된 의로움의 결과는 생명이다. 의로움은 세례를 통해 이러한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부여되고 그 결과로서 그들은 생명을 누린다. 11절 에제 37,14 참조. 에제 37,6,14: 1데살 4.14: 갈라 6.8: 필립 3,10.21: 1고린 6.14: 2고린 4.14 참조. 복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5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2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17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9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33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주해 라자로의 죽음 요한복음의 일곱 표징사화 가운데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라자로 소생사화에서 예수의 자기계시 말씀이 중심을 이루고, 죽은 라자로의 소생으로써 외적으로 입증된다. 태생소경 치유사화와 함께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세상의 빛이요 또한 세상의 생명으로 계시된다. 즉, 예수의 자기계시가 표징을 통해 그리스도론적이요 구원론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대목은 이런 표징사화의 서막에 속한다. 라자로가 병들어 죽게 된 상황보도다. 특히 유다인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예수의 죽음과,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키려는 예수의 뜻이 대화 가운데 함께 얽혀 시사된 점에 유의할 만하다. 루가 10,38-42 참조. 베다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올리브 산 동편 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하느님이 도와주시다”란 뜻을 지닌 엘 아자르의 준말 라자르가 그리스어로 발음된 것으로서 당시에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베다니아 출신”란 표현은 역사상 실재인물이었음을 뜻한다. 여기서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동양인으로만 언급되지만, 나중에는 동기간으로 명시된다. 물론 원문으로는 오빠인지 동생인지 명확하지 않다. 편의상 “오빠”로 번역한 것뿐이다. 2절 독자를 위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내용으로서 편집 때 추가된 구절이다. 마리아란 이름은 당시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아마도 분명한 구별을 위해 좀더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서술은 루카복음에 보도된 처녀를 회상한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에 보도한 내용을 미리 보도하는 일종의 선취적 보도다. “주님”은 그리스도론적 존칭이다. 3절 예수와 라자로의 관계. 그리고 예수가 와서 라자로의 병을 치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시사된다. 4절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관점에서 언급된다. 즉, 죽음과 멸망으로 끝나버리는 어두운 면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예수와 함께 이루어지는 희망적인 면에 역점이 있다. 아들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도 강조된다. 도사 투 테우(하느님의 영광)는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구약성서의 케보드 야훼와 동의어다. 5절 정신적 애정이 강조된다. 6절 오로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동한다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저자의 설명이다. 7절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에 피신해 있었다. 여기서 “유다”는 예수를 위협하는 지방으로서 예수의 운명이 이루어진 예루살렘을 암시한다. 9절 유다인들의 일반 관례에 따른 표현이다. 예수와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는 자는 “낮”에 돌아다니며, “이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다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 문맥에서는 오히려 예수가 걷는 길에 더 역점이 있다. 즉, 예수와 제자들에게는 “낮”동안, 곧 하느님이 일하도록 주신 시간 동안에는 다칠 위혐이 있다. 즉,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낮”동안 곧 하느님이 일하도록 주신 시간 동안에는 다칠 위험이 없다는 뜻이다. 예수는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걱정을 덮어주고, 함께 가도록 제자들에게 촉구한다. 10절 예수와 함께 가기를 거절한 자는 구원을 상실할 위협에 있다는 뜻이다. “그(사람)안에 빛이 없다”란 믿음을 이끄는 내적 빛은 또한 빛이신 하느님께로 이끄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11절 앞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예수의 초자연적 인식을 시사한다. “잠들어 있다”는 “죽어 있다”는 뜻인데, 제자들은 그 말을 오해한다. 이런 오해는 예수와 제자들간의 대화를 더욱 연상시킬 뿐 아니라 계시자로서 예수와 제자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도 곧,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도 시사한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권능이 시사된다. 13절 제자들의 오해 또는 몰이해가 드러난다. 그들은 “라자로가 잠들어 있다”는 말을 오해했을 뿐 아니라,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습니다”란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 독자를 위한 저자의 주해다. 14절 예수는 라자로가 죽였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제자들의 오해를 완전히 풀어준다. 15절 예수는 제자들 때문에 라자로의 병을 치유하지 않은 것을 오히려 기뻐한다는 뜻이다. 예수는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예수의 동기가 여기서 제자들로 하여금 믿도록 믿도록 믿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분명히 언급된다. 즉, 라자로의 죽음은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롭고 더욱 강한 자극을 주는 계기가 된다. 예수의 이런 동기는 자신의 수난이 다가올수록 다급한 관심사로서 더욱 자주 반복된다, 이것ㅇ느 예수의 수난으로 인해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릴 위험에 놓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제자들의 예수가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킨 것을 보고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이기고 세상에 생명을 줄 뿐 아니라, 환난 때 자기들에게 승리를 안겨준다는 것도 아울러 깨달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16절 아람어 이름 트오미를 그리스어 디디오스로 번역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유달리 토마가 자주 언급된다. 그는 요한복음이 엮어진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예수를 신뢰하며 예수가 가는 길에 함께 동참하겠다는 결단을 드러내는 말로서 예수의 권고를 당함께 받아들이고자고 청유하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 17절 라자로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은 지 사흘 후에야 비로소 확실한 죽음으로 판명하고, 시신을 무덤에 안장했다. 18절 약 3킬로미터. 19절 조문객들을 가리키지만 문맥상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판단하는 군중으로서, 그리고 목격증인 및 믿는 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에는 장례식 후에도 일주간 동안 상가를 방문하여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런 위로행위를 일종의 이웃사랑 실천으로 여겼다. 20절 관상적인 마리아와 활동적인 마르타에 대한 전통적 생각이 반영된 듯하다. 21절 마리아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비난이나 불평 또는 죽음을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 등을 드러내는 의미는 아니다. 슬픔 가운데서도 살아 있는 믿음을 드러낸다. 라자로가 죽어갈 때 마르타와 마리아는 이런 말을 주고받았으리라 여겨진다. 22절 하느님과 결속된 예수를 믿는 마르타의 신앙이 표현된다. 예수의 권능적인 도움에 대한 신뢰도 내포한다. 23절 죽은 라자로를 되살리겠다는 예수의 원의가 시사된다. 하지만 마르타의 대답에서처럼 종말 부활 신앙의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24절 종말 부활에 대한 믿음은 예수시대에도 이미 군중들 가운데 퍼져 있었다. 25절 형상어로 표현된 예수의 자기계시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우선 “부활”로 계시함으로써 마르타의 미래적 시선을 현재 자기 자신에 집중시킨다. 예수 자신이 자신에게서 찾으라는 것이다. 예수는 또한 자기 자신을 “생명”으로 계시함으로써 믿는 자 모두의 시선도 자기 자신에로 집중시킨다. “생명”은 “부활”의 의미를 내용적으로 좀더 분명히 밝힌다. 즉, 생명의 개념은 부활을 구원사건으로 명시한다. 따라서 예수는 여기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유보된 능력, 곧 “죽은 자를 살리는 힘”을 부여받아 “생명”을 가진 자로서 증언한다. 예수의 이 계시적 증언이 죽은 라자로의 소생으로 입증되고, 믿는자는 계시되는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26절 믿음에 대한 촉구와 참된 생명. 곧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에 대한 약속이 언급된다. 믿음 안에서 육체적 죽음의 한계를 이겨낼 수 있고, 지상의 삶은 예수로 인해 새로운 차원에 이른다는 뜻이다. 예수는 계시자일 뿐 아니라 또한 참된 생명을 주는 구원자다. 그리고 예수는 종말에 죽은 자를 살리는 자로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구원을 주는 자로서 졔시되고, 바로 이런 계시자를 “지금 여기서” 믿어야만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죽음의 세력을 이겨내고, 예수로 인해 이루어진 라자로의 소생은 바로 이 승리의 표징이다. 27절 예수의 물음에 대한 마르타의 대답은 예수의 계시를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 계시자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마르타의 고백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유다인들의 메시아 대망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하고, 또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유다인들의 그 기대를 뜻하고, 또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유다인들의 그 기대를 뛰어넘는 메시아, 곧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결속관계를 지닌 메시아임을 의미한다. “세상에 오시기로 된”이란 표현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구원자로서 표시한다. 마르타의 이 고백은 문맥상 예수의 자기계시에 대한 결정적 응답이요 절정에 달하는 신앙고백이다. 역사상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다. 28절 예수의 조문 은 유다인들과의 거리감을 시사한다. 29절 예수에 대한 마리아의 결속관계를 시사한다. 30절 예수는 마르타와 직접 믿음에 관해 대화를 나눈 것처럼 마리아와도 그렇게 하고자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32절 마리아는 자신의 슬픔을 예수에게 보여드리고 또한 존경도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3절 노기어린 격한 감정을 뜻한다. 아마도 불신에서 나온 슬픔과 애곡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이런 감정표현이 유다인들의 불신에 찬 비난 다음에 또다시 언급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르타에게 믿음을 가지도록 촉구한 예수의 말도 더욱 깊은 비중을 가지게 된다. 34절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예수의 의도가 시사된 질문이다. 예수의 이런 의도는 앞서 가끔씩 표현되었고, 그 의도가 또다시 시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5절 예수의 이 눈물은 단지 라자로를 사랑했기 때문에만 흘린 것이 아니다. 라자로의 무덤으로 가는 동안 예수도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죽음의 어두운 운명에 슬퍼한 것이다. 죽음의 세력과 맞서려는 예수의 비장한 각오도 시사한다. 따라서 자기의 말을 들어 주신다는 확신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미 전에 예수가 가지게 된 산란한 마음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는 죽음의 세력을 눌려 이기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36절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어둠을 없애려는 예수의 깊은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단순히 외적인 면만 보고 표현한 말이다. 37절 예수를 불신하는 일종의 비난이다. 이런 비난이 예수의 심령을 더욱 격앙하게 만든자. 라자로 소생 죽은 라자로의 소생은 “부활이요 생명”으로 자기 자신을 시한 예수의 명령 한 마디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소생은 믿는 자만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이른바 “표징”으로 보도된다. 이 표징사화의 특징은 예수의 권위적인 말들로 일관된 점과 그대로 즉시 일들이 이루어진 점이다. 38절 동굴 무덤 입구가 큰 돌로 막혀 있음을 뜻한다. 39절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예수의 의도가 담긴 권위적 명령이다. 40절 내용상 예수의 자기계시 말씀을 가리키는 듯하다. 믿음이 강조되고 약속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문맥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란 말로써 라자로의 소생과 구체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즉, 라자로의 소생은 믿는 자들에게 죽음을 이겨내는 참된 생명을 줄 수 있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표징”이다. 41절 마리아를 뒤따라온 유다인들을 가리킨다. 이제 그들은 라자로 소생의 목격증인 된다. 이 기도 자세는 아들 예수가 아버지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하는 모습으로서 내적인 깊은 결속관계를 시사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아들 예수는 언제든지 “하늘”, 곧 아버지 하느님과 유일무이한 결속관계를 지닌다. 이 관계늘 또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품위를 시사하는 그리스도론적 의미다. 일부 사본에는 “눈을 위로 들어” 대신 “눈을 하늘로 들어”로 되어 있다. 아들은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되어 있고 아버저의 뜻을 알고서 행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심을 확한다. 즉, 아들은 아버지와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께 기도하고 또한 아버지께 기도하기 때문에 아버지와 일치한다. 따라서 아들의 기도는 당연히 감사기도다. 42절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언제나 자신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여기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유일무이한 관계가 시사된다. 43절 예수가 기도하는 동기와 목적이 언급된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덤 주위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기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이 행하는 기적을 그들이 자기에 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증인으로 보고 이해하도록 기도한다. 예수의 최고 권위와 신적 권능이 표현된다. 예수의 이 권위적 명령은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듣게 되는 “사람의 아들의 목소리에 대한 선취적 의미를 지닌다. 즉, 죽은 자의 소생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이루어진다. 44절 라자로가 실래로 살아났다는 상황묘사다. 소생한 라자로는 귀신이 아니라, 이제 일상적 삶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확증하는 말이다. 45절 라자로의 소생을 통해 실제로 가지게 된 확고한 믿음을 뜻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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