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4. 가장 큰 계명 / 상경기[3] / 공관복음[7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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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0-01 | 조회수34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4. 가장 큰 계명(마태 22,34-40; 마르 12,28-34; 루카 10,25-28) / 부스러기 복음[79] 예수님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사실 그들은 기록된 율법 곧 모세 오경만 경전으로 간주하고, 이 오경 안에서는 부활을 확인해 주는 말씀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속셈을 아시고는 단호하게 힘주어 대답하셨다. ‘영원한 생명’의 의미조차 모르는 그에게 세세하게 변명거리를 만들어 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너도 잘 알다시피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둘째는 첫째보다 너가 더 잘 외우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 사랑’에 관한 이 계명을 일상에서 늘 새겨 두도록 교육받고 있다. 그들은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그들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또 일러 준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을 그들의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 다니기도 한다. 그리고 집집마다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이웃 사랑’ 역시 ‘하느님 사랑’ 못지않다. 그들은 귀가 따갑도록 이 말을 외웠고 들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그러자 율법 학자는 두 계명을 직설적으로 일러주시는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는 일상의 삶에 직접적인 계명만을 꼬집어 주시는 예수님께 달리 시비 거리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짐짓 자신도 그 정도쯤은 안다는 흉내는 내야 한다는 평소의 오기를 드러낸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제 생각 역시,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는 분명히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그래,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리고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려고 찾아온 그를 몰인정하게 핀잔을 주어 돌려보낼 마음을 느끼지 않으신 것 같다. 비록 의심의 눈초리로 찾아온 그를, 예수님께서는 그래도 그에게 내심 호의를 보낸 것만은 확실하다. 그가 그나마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담긴 계명만은 일상의 삶에 배어 있는 것 같기에. 예수님의 그에게 보인 그 호의에,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예수님께 묻지 못하였다. 사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인에게는 이 두 계명은 늘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 하느님과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이웃 사랑은 모든 신앙인의 삶에 묻어있어야만 한다. 이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한 형제자매이니까 그렇다. 이렇게 신앙인의 가장 큰 계명을 두고도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의 갈등은 쾌나 있었다. 그것은 당대에 ‘내가 나’인데 식의, 소위 지도층의 오만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늘 예수님과 대적할 거리만 찾았다. 그들은 모세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이웃보다는 하느님 사랑에만 우선을 두었다. 그렇게 둘을 달리 구분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벗인 이웃을 버려준 채, 오로지 자기중심에 젖어 ‘나’뿐이었다. 너는 너, 나는 나, 다른 우리였다. 그렇게 남과는 다르다는 그들만의 편견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아주 단호하셨다. 그래서 그들과 예수님 사이는 늘 긴장이 팽배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비 거는 율법 학자에게 두 계명의 중요성을 부여하시면서, 율법 전체를 이 두 계명으로 한데 모으시고 땔 수 없게 단순히 정리하셨다. 하느님 사랑과 그분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웃 사랑, 이것이 우리 신앙인에게는 가장 큰 계명이다.[계속] [참조] : 이어서 ‘5. 나는 누구의 이웃이어야?(루카 10,29-37)’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이 이야기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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