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해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파견 받은 자 안에는 파견한 이의 조각이 들어있다> 복음: 루카 10,13-16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만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복음의 흐름에 따라 이는 당신이 파견하신 제자들이 일으킨 기적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바로 위의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고 파견하신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입니다. 누구든 자신이 인정하는 자를 파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여 파견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그분의 인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곧 그분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암행어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임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파견하신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잘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 나라 열쇠를 주시며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인데,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용서됩니다. 성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그 교회를 파견하신 분을 모독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연인과의 사랑,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 그리고 형제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나뉩니다. 이 세 사랑이 각기 그 이유가 다릅니다. 연인과의 사랑은 내가 필요한 것을 상대가 주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의 피가 자녀에게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며, 형제 간의 사랑은 부모로부터 파견 받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안에 부모의 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형제는 부모에게 더는 사랑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도 이 현상은 똑같이 일어납니다.
만약 부부간의 사랑에서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주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남편은 돈을 벌지 않고 놀기만 하며 아내는 아기를 낳지 않으려 하고 받은 돈을 낭비하기만 한다면 그 사랑이 오래갈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관계는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녀가 부모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때문인 것은 맞습니다. 자녀가 자기를 부모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기가 갓 잉태되었을 때는 낙태를 해도 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충분히 자랐을 때 낙태 하면 그 죄책감은 그만큼 커집니다. 자녀가 자신에게 무언가 해 준 게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녀에게 그만큼 자기 피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그만큼 자신의 조각이 되는 것이고 자녀를 사랑하지 않음은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됨입니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어서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피가 그만큼 섞여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자라서 형제가 되면 자녀들은 부모에게 파견 받습니다. 피 안에는 부모가 원하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부모가 주었으니 필요한 것을 받으려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형제 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지팡이의 힘이 자신만이 아닌 형제를 위해 쓰여야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만약 형제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이는 자녀가 부모가 자신에게 준 피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의 피를 사랑하지 않는 자녀는 부모에게 사랑 받지 못합니다. 결국 부모는 자기 자신은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형제가 자신을 사랑해주는데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부모는 마찬가지로 그 자녀를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거부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녀는 파견된 자이고 파견된 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녀는 거부 당한 부모에게 거부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조각을 품고 파견된 교회가 과연 어떤 교회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를 파견한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죄의 용서의 힘을 가지고 파견된 교회를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과정에서 오펜하이머가 과연 미국의 과학자인지, 아니면 소련의 스파이인지에 대한 갈등을 그렸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을 위해 일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그가 소련의 스파이라고 믿게 만들려고 합니다. 내가 누구에게서 파견 받았는지가 너무 중요합니다. 만약 미국 만을 위해 일한 오펜하이머가 소련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려 했다면 그 사람이 반역자가 됩니다. 영화는 실제로 그렇게 결론지어집니다. 미국은 자기를 위해 일한 오펜하이머에게 누명을 씌우려 한 사람에게 오히려 책임을 묻습니다. 파견된 자는 파견한 자의 조각인 피를 지니고 있고 그에 대한 거부가 그를 파견한 자에 대한 거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결국 교회의 딸이어야만 합니다.
https://youtu.be/IGRVerVYD2c?si=1aMdPJlTBtDI8iXv 유튜브 묵상 동영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