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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44) 로마에 가고 싶다. (로마15,22-33)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02 조회수74 추천수2 반대(0) 신고

로마서 15장 14~21절 큐티- 바울: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 복음의 제사장, 이방인의 사도 (매일성경 묵상)

 

2024. 2. 2. (금요일)

 

로마서44) 로마에 가고 싶다.

 

(로마15,22-33)

22 그래서 여러분을 찾아 가려던 나의 계획이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23 그러나 여러 해를 두고 여러분을 찾아 가려고 별러 온 나는 이제 이 지방에서 할 일을 다 끝냈기 때문에 24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 잠시나마 함께 지내면서 즐거움을 나누다가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 곳으로 가게 되었으면 합니다. 25 그러나 지금은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에게 구제금을 전하러 갑니다. 26 그것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같은 교우로서 정을 나누려고 기쁜 마음으로 보낸 것입니다. 27 그들은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보냈지만 그들에게는 또한 그렇게 할 의무도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정신적인 축복을 나누어 가졌으니 이제는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그들을 도울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28 나는 모금을 마치고 그 돈을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확실히 전해 준 다음에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스페인으로 가려고 합니다. 29 내가 여러분을 찾아 갈 때에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축복을 안고 가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30 형제 여러분, 나는 성령이 베푸시는 사랑을 믿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느님께 간곡히 기도하여 주십시오. 31 내가 유다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화를 입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구제금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쁜 선물이 되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 32 그리하면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을 찾아 가 함께 즐거운 휴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33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아멘.

 

사도 바오로는 로마를 가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복음이 전파되어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는 매우 고무되어 있습니다. 로마는 당시 세계 제국의 수도였고 또 사도 바오로가 이해하고 맡은 사역이, 복음이 전 인류에게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가보고 싶죠.

그러나 여러 가지 일로 몸이 묶여서 못 가고 있는 중에 편지를 먼저 보낸 것이 로마서입니다. 그리고 그의 궁극적인 선교 목적지는 스페인입니다. 너희를 지나서 난 스페인까지 가겠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예루살렘에 가야 할 일이 있어서 너희에게 먼저 편지부터 보낸다. 이렇게 된 거죠.

예루살렘에 가야 하는 일은 이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야, 지금의 발칸반도의 북부 지방이 마케도니아, 남부가 아카이야, 지금 우리가 아는 국가명은 그리스 북쪽에 필리피 교회, 테살로니카 교회 등이 있고, 아래 남부에는 코린도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들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냈습니다.

그걸 전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되어서 예루살렘에 먼저 갔다, 와서, 그리고 충만한 기쁨을 가지고 로마에 가고 그리고 스페인에 갈 작정이다. 그런데 내가 예루살렘에 가는 일에 너희 기도하여 그 일이 순조롭고 기쁨이 되고 은혜가 되도록 나를 위하여 기도해다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루살렘에 가는 일이 어려운 일일까요? 사도 바오로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고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약속하신 메시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불러 목적하신 궁극적인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지 않고, 하느님을 믿고 그러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것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로 인하여 그 모든 것이 무효화 되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는 은혜에 의한 구원이라는 말을 저들은 거의 모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선교 여행 동안, 말하자면 터키 지방의 선교나 그리스 지방의 선교에 언제나 유대인들의 공격 아래 목숨의 위협을 받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믿는 유일신, 그 종교를 지키기 위하여 이 이단아,’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왜곡시키는, 사도바오로를 처형하기 위하여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방해를 했죠.

그러나 바오로는 사실상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택하고 그리고 그 약속대로 메시야를 주시고 그 메시야가 어떻게 구원을 성취하시고 그것을 모든 인류에게 베푸셨는가를 이제 깨우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 교회를 세우고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보낸 것을 큰 사건으로, 그래서 어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가 모두 예수 안에서 동등한 하느님의 구원과 은혜를 나누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큰 사명이 됐죠.

그런데 틀림없이 예루살렘에 돌아가면 그 민족주의자 국수주의자 배타적 유대교를 고집하는 자들이 이제 바오로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에 예수를 믿는 교회가 세워졌지만 민족적 우월감에 의한 감히 이방교회가 우리를 돕다니!”라는 곱지 않은 어떤 오해와 불쾌감으로 인하여 그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 안에서라는 형제애를 나누려고 했던 이방교회의 진심에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압니다.

요즘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겪는 식으로 얘기하자면, 그러니 오해받을 짓은 안 하는 게 최고야!” 이렇게 될 수 있는 일을 맡은 것입니다. 그러니 근본을 따지고 보면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면, "그럼 하느님이 왜 결국 전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유대인만 따로 선민으로 택하셨을까?"로 질문이 거슬러 올라가게 되죠.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교와 연속성을 가지지만 그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준 약속들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어 모든 인류에게 그 혜택을 준다고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걸 이해 못하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우리는 마음으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하여 가지는 배타적 폐쇄성을 그리스도교 2,000년 동안 사실은 보이게, 보이지 않게 가지고 있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는 내내 이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바보같은 유대인들, 그 따위로 하다니! 그러다 예수를 못 박고. 천하의 못난 놈들!’ 이게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이런 배타적 신앙관과 확인을 가지는 것은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교인들에게도 하나의 걸림돌이, 올무가 되고 있습니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그러니 하느님 애초부터 무슨 선민을 따로 뽑지 마시고 이스라엘을 제사장 국가 삼아서 결국 온 인류에게 주실 복음이었다면 보다 보편적인 방법을 택하시는 게 좋지 않았습니까? 라는 질문이 나올 법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자 바로 그것, 선민과 이방인을 가른 것 같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하느님이 일하시는 일에 선인과 악인을 나누시고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를 나누시고 잘난 자와 못난 자를 나누시는 현실은 무얼까? 그게 오늘 로마서 15장이 다루는 내용이지요.

스스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선민(選民)입니까, 이방인(異邦人)입니까? 뻔한 질문에 답을 안 하는 건 한국사람 밖에 없습니다. 너무 뻔하면 함정이 있다. 그렇게 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잘난 사람입니까?, 못난 사람입니까? 그런 건 함부로 진심을 얘기하면 안 되죠. 그때마다 달라요. 그쵸?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우리는 현실에서의 우리의 지위, 우리의 조건에 늘 흔들리게 됩니다. 선민의 특권은 무엇이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선민이 되어 무슨 복을 가지게 됐을까요? 자부심을 가지게 되지요. 자부심. 그럼 이방은 뭘 가지게 됐을까요? 이방은 자부심이 없는 게 됐죠. 편견이 없게 됐을 것입니다. 생각 없는 역할을 맡은 거죠.

유대인들이 잘난 척 할 때 이방인들은 저건 뭔가 그랬습니다. 무슨 너희는 그러냐? 우린 이거다. 사실, 이방인들은 그쪽에는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에 상응하는 다른 주장은 이방은 없었습니다. 그저 살기 바빴죠. 유대인들의 선민으로서의 자랑은 하느님이 무엇을 쓰기 위하여 그 자랑을 주었느냐 하면, 약속에 진실한 하느님을 보이기 위해서 선민을 구별했다. 그럽니다. 그것이 오늘 로마서 157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로마15,7-8)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 들이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 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8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진실성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할례받은 사람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셨고

 

그럽니다. 이방에겐 안 주었던 것 대유교 사람들, 이스라엘에게만 준 것, 하느님이 나타나시고 관계를 맺으시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들과 여러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다 지키심으로 하느님이 진실하시다는 것을 선민이라는 혜택으로 충분히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그럼 이방은 뭐냐? 이어 나오는 구절입니다.

 

(로마15,9-12) 9 이방인들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성서에도, '그러므로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주께 찬양을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리라' 하였고 또, 10 '이방인들이여, 주님의 백성과 함께 기뻐하여라' 하였으며 또, 11 '모든 이방인들이여, 주를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도 주를 찬양하여라' 하였습니다. 12 그리고 이사야도,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돋아 이방인들을 다스릴 분이 나타나리니 이방인들은 그분에게 희망을 걸리라' 하였습니다.

선민을 구별하여 저들과 관계를 가지시고 그리하여 약속을 주시어 그 약속을 지키시는 진실한 분이라는 것을 선민이라는 그런 조건으로, 선민이라는 그런 택하심으로 하느님의 분명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그 분명한 하느님, 신실한 하느님이 무엇을 하시려고 하느냐를 이방, 약속하지 않은, 특별하지 않은 관계 속에 마치 외면한 것 같은 자들에게 다 줌으로써 하느님이 자비(慈悲)의 무한한 하느님이라는 걸 보이셨습니다.

선민과 이방의 차별은 우리에게 옳고 그르고 잘났고 못났고의 구별로 다가오지만 하느님은 선민에게는 하느님의 분명하심을, 이방에게는 하느님의 무한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어느 역을 맡고 싶으십니까? 분명한 역을 맡은 사람이 배타적 우월감 속에 있는 것은 그 사람이 못나서 그런 겁니다.

보다 넓은 은혜의 무리로서 하느님이 자비로 복() 주신 사람이 무책임하고 게으른 것은 그 사람이 못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하느님 되시는 진실하심과 무한하심 끝없는 은혜가 이런 구별을 통하여 하나로는 분명하지 않을, 하나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것을 신적 능력으로 우리 인류에게 역사에 분명히 보이셨다. 는 것입니다.

그러니 뭘 하라는 거죠? 그러니 네가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때, 네가 누구에게 손해를 입을 때, 네가 어떤 조건 속에서 억울할 그것을, 그 조건을 없애거나 그 상대를 없애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 하느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잔의 사과'라는 책이 있는데 제가 인용하는 것은 외국인이 쓴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 세잔, 그 세잔의 사과라는 것은 세잔이라는 화가가 미술에 대하여 치열한 연구와 노력과 그 정성을 다 기울였기 때문에, 전문적 치열함과 노력, 그걸 표하는, 그 관용과 같이 '세잔의 사과' 그러면 '전문성을 구하는 노력', '그 고급한 경지' 같은 뜻이 되어 있습니다.

대단한 화가인데 자기 아내를 아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초상화를 여러 점의 그 초상화를 남겼는데 하나같이 그리다 만 것 같이, 무슨 습작을 한 것 같이 장난삼아 그린 것 같이 대강 그렸다는 사실입니다.

칙칙하고, 잘생길 것 없는 표정에 자세가 부자연스럽게 어깨의 균형이라든가 팔이 놓인 자리가 다 어색하게 병원 대합실에 앉아 있는 사람 같이 다 그린 것입니다. 이런 것을 사실로 그렸을 리는 당연히 없다. 이게 그 책에 주제입니다.

세잔은 뭘, 무엇을 그려낸 것일까? 자기 아내의 아름다움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기술로는, 표상할 수 있는 것으로는 그려낼 수 없다는 걸 알아서, 일부러 기술을 쓰지 않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상상으로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완성에 그 경계를 넘어가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시편 8편에 가면, 그런 동일한 얘기가 시편에 나온다고요.

(시편8,1-9) 1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2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3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5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6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7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9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이 시는 하느님이 만드신 인간의 영광을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사람의 발 아래 두셨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긴데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게 뭘까요? 세잔의 사과, 인간을 인간이 상상하는 최고의 모습으로 그려주지 않고 거기다 조금 못하게 그려서, 우리가 소원하는 가장 멋진 것을 넘어서도록 우리를 자극하고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급반을 안 하고 오면 우리의 소원은 뭐죠? 완벽하고 싶은 거지요. 완벽에 있어서 우리의 완벽은 결국은 다 윤리적이고 기술적이고 그리고 심리적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거 아니다를 우리로 하여금 늘 윤리적 결함이나 기능적 무능이나 심리적 불안에 절절 매고 있는 우리에게 너는 그걸 해결해야 되는 게 아니고 나를 만나고 나를 의지하고 나로부터 힘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책을 하거나 누구를 이렇게 증오하고 분노하는 것들은 모두 하느님의 일하심에 대한 무지(無知)입니다. ‘저건 왜 저래?’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신 하느님의 신비를 알라고요.

세잔의 아내, 왜 그렇게 그렸느냐? 저 못난 건 왜 있는지, 하느님이 무얼 하시는가, 선민이 되어 이방, !” 이렇게 하지 말고 그들을 은혜로 품으시는 하느님, 내가 잘났으면 저들을 위하여 잘나야 된다는 걸 아는 그 자리,

잘난 것이 배타적 우월감으로 가지 않고 나를 키워 저들을 먹이기 위해서 나에게 줬다는 걸 아는, 원수를 잠재우기 위하여 젖먹이들과 어린아이를 동원하는 하느님.

모세가 위인이라고요? 모세가 하느님이 필요한 걸 채웠다고요? 신성모독 발상이죠. 우리 중에 누가 하느님께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방해물이죠. 우리를 안 쓰고 하느님이 혼자 하시는 게 백 번 유리하죠.

우리를 쓰면 천천히 걸으셔야 되는데요. 그리고 우리한테 하느님이 다 가르쳐주시면 뇌가 터질 텐데요. 강제로 하면 비명을 지르잖아요. 우리랑 하시죠. 우리만큼 가지고도 이길 수 있는 하느님, 하느님이 하느님을 다 드러내시지 않고 우리만큼 갖고 이기실 수 있는 하느님이다.를 매일 확인하는 거죠.

난 왜 이래? 그것이면 충분해. 보리떡 다섯 개면 돼. 그러잖아요. 적을 만나면 저건 괜찮다니까 물맷돌 하나면 돼. 우린 여유가 없죠. 이 여유, 믿음이 없는 거예요. 하느님이 뭘 어떻게 하시는지 모르니까 밤낮 조건에서, 힘에서, 우위에 서고 내 마음에 들게 상대방들을 무릎 꿇리는 일로만 해결을 하자고 들죠.

결국은 고함만 서로 높아지고 밤낮 인상만 쓰다 가는 것 아니에요. 그러지 말래는 거죠. 걱정 말래는. 고린도전서 4장에 가면, 이런 설교들은 막 눈에 별빛이 나타나고 눈썹에 무지개가 피고 그래야 되는데, 무지개는요 흑백으로 뜨면 안돼요.

(1코린4,1-5) 1 여러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며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2 관리인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입니다. 3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또 내가 나 자신을 심판하지도 않습니다. 4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무슨 일이나 미리 앞질러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 내시고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을 드러 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하라. 자기의 조건을 살아라. 충성해라. 드라마의 배역을 맡아서 나오면 거기에 맞는 분장과 옷을 입고 나와야 될 거 아니에요. 그 드라마에서의 자기의 지위를 연기해야 될 거 아니에요. 종인지 죄인인지 관리인지 혹은 무슨 우국지사인지 자기 배역에게 충성하시오.

이게 뭔가요? 하느님이 하실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잘못했을 때는 후회하고 그래서 하나씩 더 나아가고 그게 우리 인생에게 준 복입니다. 실제로 해보는, 그래서 나아지는 것, 후회하고 성찰하고 그 속에서 하느님이 은혜를 베푸는 것을 확인하는 거죠.

못난 짓 밖에 한 것이 없는데 훌륭해지는 것, 인생,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그래서 언제나 일찍 죽어야 되는데,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면 그 다음엔 더 이상 갈 데가 없기 때문에, 남아 있으면 망가지기 때문에, 동화는 왕자와 공주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더래요로 끝나고, ‘위인은 일을 마치면 죽어버려야됩니다.

남아 있으면 서로 서로 혼란스러워지죠. 남은 사람은 아직도 갈 자리가 있어서 스스로의 성숙, 만족, 감사의 자리로 하느님이 이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가면 사랑이 무슨 얘기냐 하면, 이 충성하고 남을 판단하지 않는 일을 사랑이라고 하는데, 사랑이 구체적으로 뭐냐?

(1코린13,4-7) 4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뭐냐?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 마음의 행복과 넘치는 실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을 하느님이 만들었고 하느님이 보내셔서 하느님이 일하신다. 라고 믿는 것입니다. 입 다물고 있는 거지요.

그 속 얘길 하는 것은 무례한 것이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넌 나쁜 놈이야.” 그 말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하심을 반항하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아요? 저 사람은 아무 쓸데없이 있다. 하느님이 할 때, “넌 니 일이나 해라.” ‘너나 잘해는 예전에 교회 표어였습니다. 그 말을 기억하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가장 극적인 기적은 죽음을 뒤엎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린 아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게 실컷 로마서의 얘기였습니다. 예수 안에서의 구원이라는 게 어떻게 큰 은혜인가를 설명한 후에 로마서 12장부터 내내 가장 주된 배경, 주된 톤이 뭐였냐 하면,

(로마12,9-21) 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십시오. 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 11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 13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15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십시오. 16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18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19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20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21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

 

분명함이 넉넉함으로 쓰이라구요. 우리의 분명함이 좁아지는 대로 가져가지 말라구요. 그 넉넉한 그 분명함이 모두를 감수하게 하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로만이라는 말이 모두를 참을 수 있게 하라고, 그 넉넉함이 13장에서는 뭘로 나왔는지 아세요?.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이것이 예의예요.

예의는 어디서 나온다구요? 하느님의 일하심에 진실하심과 지혜와 넓이를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거죠. 각각을 덕목으로 붙잡아서 윤리가 되면 믿음은 사라지고 그 사람의 의지와 자랑만 남습니다. 그건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일하심을 인정하는 자의 충성, 관용, 분명함과 헌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애를 다시 살펴보시오. 얼마나 넉넉한 지위와 운명과 조건 속에 있는지 알겠습니까? 울어도 넉넉해야 되고 힘들어도 넉넉해야 되는 겁니다. 아이고 하느님 내일은 조금 나은 하루를 주십시오.” 오늘 충분히 울었습니다. 그런 잠자는 기도가 나오고, “하느님 내일도 그러면 콱 죽어버릴 거예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그래야 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교 신앙이에요. 현실이 우리를, 현실이 우리를 이기지 못해요. 하느님 손에 있으니까요. 그러니 충성하는 거예요. 웃을 수 있는 거죠. 누구와도 나쁜 생각을 안 하지요.

볼프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크로아티아 사람인데 끔찍한 내전을 겪어서 정말 동족들의 손에 의해 에 가족들이 살해되는 현장을 살아온, 그래서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 속에, 그래서 신학자니까 그걸 신학으로 풉니다. 그게 뭔가? 결국은 용서해야 된다.

그래서 그 강연을 하는데 유명한 다른 신학자가 와서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용서했는가? 그 강연은 알아먹겠는데, 그래서 당신은 용서했는가? 이 사람이 침묵을 지킵니다. 거듭 질문하지요. 답을 못했습니다. 그러면 강연은 왜 이렇게 하는가? 이것이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로 나아가야지요. 거기에 거리가 있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러나 방향도 없고 목적지도 모르고 다만, 명분만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 못하는 것, 우리의 실력상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못하는 건 무슨 보상을 받는 어떤 효과가 있는가 그걸 겪어야 됩니다. 보복으로는 아무런 답이 없다는 걸 살면 배웁니다. 누구를 욕하는 것으로 아무런 영혼에 유익이 없다는 것을 인생을 통해서 실컷 배운 성경이 얘기하는 용서는 우리 영혼의 답이 되고 우리의 인격과 인생을 감사하게 합니다.

성경의 요구는 다만 강요가 아니라, 다만 윤리와 가치가 아니라, 그 실체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성경이 권하며 요구하며 우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 복된 인생을 사는 우리들을 위해서 이 의심 많고 고함소리만 높은 이 시대,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진, 이 사람이 옆에 있으면 숨을 쉴 것 같은 사람으로 우리의 자리를 지켜내고 이 시대를 구원해내시오.

 

우리의 인생에 억울함과 고통과 절망과 비참함을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주실지 성경에 가득 약속이 되어 있고 그 일을 예수로 증거하셔서 우리 생에 확인시키십니다. 그 길 걷고 있습니다. 말씀의 위대함을 살아가면서 하루씩 배워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결국은 하느님의 일하심을 찬송하는 결론이 나는 그 인생을 사는 자, 그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시어, 우리와 우리 가족과 우리 나라와 이 사회와 이 시대와 이 세상을 구원하는 자들 되게 하여 주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꺼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우리 하느님, 우리와 늘 함께,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동행하시며 지키시는 성령님의 동행하심이 주님의 약속과 베푸시는 은혜를 기꺼이 마음으로 받아 우리의 삶에서 순종하고 충성하고 자랑하리라 약속하고 돌아가는 심령들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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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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