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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요한 16, 20 - 23
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5-09 조회수43 추천수2 반대(0) 신고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16, 22)


사순시기에서 부활 시기로 영적 움직임은 불안에서 평화로 그리고 근심에서 기쁨으로 회심입니다. 사순기기는 해산할 여자처럼 걱정과 근심에 싸이지만, 부활 시기는 해산한 여자처럼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쁨은 평화처럼 부활의 선물이고, 부활의 기쁨은 사랑하는 이와 재회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하나의 선물, 곧 무상으로 받은 선물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15,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기쁨은 우리 안에서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의 기쁨이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의 기쁨으로 영원한 생명 안에 있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어떤 누구도 이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16,23)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기쁨 중에 살아가는 삶이 바로 크리스챤 생활입니다.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사랑이신 주님 안에 머문 삶의 결과가 기쁨이며 이는 바로 내적 기쁨이자 존재적 기쁨입니다. 이를 체험하고 지속할 수 있는 삶이 바로 기도 생활입니다. 충실한 기도 생활은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기쁨이 충만한 삶은 기도 생활에 더욱 충실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나이 들어가는 것이 참 좋습니다. 예전 보다 세상의 이치는 물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 살 때,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살았던 젊은 필리핀 신부에 대한 저의 느낌은 긍정적이기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인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그 까닭이란 제 눈에는 보이는 것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지, 도대체 아무것도 행하려 하지 않았지요. 결국 제대로 본다는 것도 단지 보이기에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함께 살 때 보는 것은, 육으로 보는 것이었고 거짓되고 피상적인 봄이었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그에 따른 제자들의 슬픔을 처절하게 겪고 난 뒤 다시 보게 된 부활을 체험한 이후의 보는 것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고 봅니다. 즉 후자의 보는 것은 곧 마음이나 심령으로 보는 것으로써 이 보는 것은 참되고 깨달음을 수반한 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소경이 눈을 뜨듯 참된 심령의 눈을 뜨게 됨으로써 모든 것을 보면서 이해하고 꿰뚫어 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영적인 눈을 뜨고서는 제자들은 몰이해의 안개가 걷히듯 모든 것을 제대로 불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의심이나 의문이 사라졌기에 주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성령을 체험한 후의 우리 역시 동일하게 믿음의 눈이 열리고 부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인식하고 의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참된 내적 전환 곧 근심, 슬픔에서 기쁨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외적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그 흐르는 시간의 강 밑바닥에 침잠되어 있는 근심의 무게를 깊은 내성과 숙고를 통해 거슬러 올라와야 만이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의 과정을 해산의 진통에 비유하십니다. 마치 해산을 앞둔 여인에게 산고가 예고되어 있듯이, 우리도 인생을 ‘苦海’라고 표현했듯이 인생 항로에서 갖가지 근심과 시련의 시간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이 겪을 어려움과 고통을 무의미하게 생각하거나 남을 탓하거나 불평하고 원망하며 힘겹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후에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이 계시기에 고통과 질곡의 시간을 인내하고 희망하면서 닥칠 그 날을 고대하면서 고통을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부활 이후 제자들의 슬픔, 근심은 기쁨으로 변화되었으며, 이 기쁨은 실제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많은 순간 중에서 가장 강력한 순간은 이산가족 상봉 중계방송을 시청할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과 재회의 기쁨, 다시 만남의 기쁨!!! 생사를 모르는 채 살아왔던 남과 북의 이산가족이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을 연상한다면 아마도 부활 후 스승을 다시 만났을 때 제자들의 기쁨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물론 그 재회의 기쁨의 크기가 큰 쪽이 어느 쪽이라고 단정할 수 없겠지만, 자신들의 눈앞에서 죽으셨던 주님을 생생하게 다시 만나 제자들의 기쁨이 훨씬 더 컸으리라 봅니다. 자신들의 어떤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다시 찾아오셨기에 받은 기쁨이었기에.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 전혀 다른 기쁨입니다. 세상적인 기쁨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쁨이 일시적이고 지나가며 외적인 기쁨이라면, 주님께서 부활 후 주시는 기쁨은 지속적이고 항구하며 내적인 기쁨이라는 점입니다. 그 기쁨은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근원적 기쁨이며 존재적 기쁨이고 은사적인 기쁨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통해서 가져다준 부활의 기쁨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쁨을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내 영혼 안에 함께 계시는 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한 마디로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입니다. 잦은 자연 재화와 전쟁으로 말미암은 경향일 수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외적인 기쁨,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것만을 추구하기에 참된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입니다. 그중에서도 바로 젊은 세대가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 어려움을 견디어 내는 끈기도 인내심도 없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한국인 하면 으레 은근과 근기를 말했었는데, 보릿고개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기에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뻐하기보다는 너무 화려하고 큰 것만을 추구하기에 그러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외적 사회 구조 자체가 그들의 희망을 꺾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는데, 익숙하다 보니 삶의 잔잔하고 소소한 작은 기쁨이나 참된 존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어 마음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 곧 참된 기쁨이 지금 근심하고 슬퍼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 참된 눈이 열리게 되길 기도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기억합시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필리 4,4)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사18,10) 하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도 바오로는 항상 늘 기뻐하며 살았을 뿐만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였습니다.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의 좋은 성격이나 노력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받는 사랑에서 내어주는 사랑을 자신이 먼저 사신 분이십니다. 이는 사랑받고 싶은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쁨에서, 이제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의 기쁨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 존재의 기쁨을 충만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울한 성인은 불행한 성인이기에 불행한 성인이 아니 되기 위해서 우리는 늘 환난이나 근심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아갑시다. 기도를 대신해서 김종삼의 「어부」라는 시를 보내니 음미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삶이 힘들더라도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되는 날까지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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