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영근 신부님_2024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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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6-16 | 조회수147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17,22-24
22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형제 여러분, 6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손수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고, 그 나무가 무성하게 하는 이가 당신 주님이심을 알게 하리라.”(에제 17,22-24 참조)고 새로운 나라의 희망을 알려줍니다. 이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로 말씀하신 ‘겨자씨’를 떠올려줍니다.
제2독서에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2코린 5,9)라고 하느님 나라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르 4,27) 먼저, ‘씨’는 우리에게 선사됩니다. 선물로 주어집니다. 곧 주시는 분에 의해 건네져 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가는 나라’, 혹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건네 ‘온’ 나라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이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우리들 가운데 들어와 있고, 스스로 줄기를 뻗고 싹을 틔우며, 이삭을 맺고 낟알을 영근다는 사실입니다.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왔지만,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곧 체험하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들어오는’ 나라요, 동시에 ‘들어가는’ 나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성장하고 자라며,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이삭을 맺고 낱알을 영글어 갑니다. 아무도 하느님 나라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막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위대한 은총이 우리 안에서 계속 자라도록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마르 4,31) 오히려 ‘작은 모습’으로 와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이미 우리 안에 심어진 씨앗입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듯, 그 그늘에 짐 진 이들을 불러 안식을 주듯, 자라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 작은이로 오실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작아져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작은이로 계신 그 씨앗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속에서 썩기만 하면 말입니다. ‘씨가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게’ 그렇게 썩는다면 말입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갈 만큼, 작아지고 낮아지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그 나라를 체험하게 되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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