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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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10-28 | 조회수120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루카 6,12-19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어떤 대상의 외적인 모습이 극적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두고 ‘탈바꿈’했다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로 ‘가면’을 뜻하는 ‘탈’에 ‘바꾸다’라는 동사가 붙어서 배우가 탈을 바꿔쓴 것처럼 외형이 극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뜻하는 겁니다. 탈바꿈하기 전에는 여러가지로 미숙하고 불완전한 모습이었지만, 탈바꿈을 통해 변화되고 성숙해져 완전해졌다는 것이지요. 가톨릭 교회는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두 사도의 축일을 함께 지냅니다. 두분의 축일을 함께 기념하는 것은 두 분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두 분이 함께 페르시아로 선교여행을 떠났다가 함께 순교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분이 예수님의 친척이었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두번째 공통점을 가지고 ‘탈바꿈’이라는 주제로 묵상해볼까 합니다.
두 분이 예수님의 친척이었다는 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사는데에, 더 나아가 그분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소명을 다하는데에 플러스 요소였을까요? 아니면 마이너스 요소였을까요? 아마 제자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에는 꽤나 큰 마이너스 요소였을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내며 쌓인 기억들 때문에 마음 속에 ‘인간 예수’의 이미지가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고, 거기에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그리스도’에 대한 고정관념이 더해져 자기 친척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쓴 적 없는 새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이미 진한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가득차 있는 캔버스에 새 그림을 그리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먼저 흰색 물감으로 캔버스 전체를 여러 번 덧칠하여 다시 새하얀 상태로 만들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시몬과 유다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사도가 되기 위해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했을 겁니다. 자기 마음 속에 이미 진하게 그려져있는 ‘혈연’이라는 그림을 믿음이라는 흰색 물감으로 여러 번 덧칠하는 동안 여러 의구심과 회의, 질투와 편견 등으로 마음이 심란해졌겠지요. 그런 힘들고 괴로운 과정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기도’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혈연으로 엮인 자신들을, 여러 구설수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사도’로 뽑은 것은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시면서 그분 뜻을 마음에 받아들였기 때문임을 자기들 두 눈으로 직접 보아서 잘 알았기에, 자기들도 예수님을 사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내적으로 치열하게 싸우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힘으로 사도로 탈바꿈 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시야를 영적인 관계로까지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참된 관계를 인간적인 기준과 조건 안에서 맺으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에서 제자로, 제자에서 사도로 탈바꿈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도 이렇게 탈바꿈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세속적인 성공에 얽매여 살았다면, 그분을 알게 된 후에는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복음에 기대어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하느님께 받을 벌을 두려워하는 종처럼 살았다면, 그분을 알게 된 후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까봐 염려하는 그분 자녀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통해 조금씩 하느님을 닮아감으로써 그분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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