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해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하느님 나라: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복음: 루카 13,18-21
LORENZETTI, Pietro 작, (1325)
|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습니다. 잘 자라서 새들이 깃들이게 하고 잘 부풀게 해서 부드러운 빵이 되게 합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말씀, 혹은 성체라 한다면 그 씨와 누룩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작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휴식 같은 친구, 군고구마처럼 맛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닮아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며 자신도 행복하게 되어있습니다. 며칠 전 20년 전에 제가 보좌를 할 때 중고등부 교감 선생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왔을 때 병자성사도 주고 기도도 해 주었지만, 그 이후엔 연락을 못 했습니다. 마지막 때도 바빠서 임종 직전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동안 전화도 한 통화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정말 한 가지 확실한 건 나 때문에 누군가 고통스러워지면 나도 고통스럽고 나 때문에 누군가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려면 그게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겨자씨가 뿌려질 필요가 없고 누룩이 넣어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34회에는 공부하기 싫은 11살 아이에게 계속 공부를 강요하며 아이를 못살게 구는 엄마가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4살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엄마의 뜻이 살아있다면 자녀를 쉬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면 자기 뜻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면서 그것이 상대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 누군가에게 휴식이 되고 양식이 되게 해 드려야 합니다. 바쁘다, 바쁘다만 하고 살다가 아플 때 연락도 못 하고 그냥 떠나보낸 나에게 다시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이희윤 마리 스텔라 수녀님의 서울대교구 주보에 게재한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어느 날 저에게 예비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던 자매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반갑게 전화를 받았는데…. 자매는 남편과 한 달 전에 이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워 “이혼을 결정하기 전에 나와 좀 만나서 이야기 좀 하지…” 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 그 자매의 대답이 “수녀님 늘 바쁘시잖아요. 안 그래도 바쁘신데 저희 일로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바빠도 난 너희가 더 중요하고, 너희가 원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하고 대답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바빠… 바빠서…” 하면서 늘 동동거리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신호등의 초록 불빛이 멀리서 보이면 숨이 차도록 뛰어가서 건너고, 전철이 출발할까 봐 계단을 허둥지둥 오르내리고, 빠른 환승 게이트가 어디인가 찾아보고. 사실은 그렇게 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바쁘게 사는 일’에 길들어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바빠 보이는 저의 모습이 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주저하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 바쁜 마음과 몸 또한 죄악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했던 연피정이 생각납니다. 지도 신부님께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녀원 밖으로 나가서 모르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사람들 사는 모습도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7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저는 천천히 걸으면서 하늘도 바라보고, 하늘 위에 흐르는 구름도 가만히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아주머니를 따라가서 짐을 함께 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작은 꽃을 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곁을 스쳐 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멈춰 서서 그분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면 그분들은 고마워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상시와 같았다면 무심코 지나갔을 많은 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어루만지는 저 자신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가 멈춘 그 자리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꼈습니다. 어떤 분이 “수녀님 바쁘지 않으세요?”라고 질문했을 때 제 대답은 “저요… 있는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습니다”였습니다. 시간과 바쁨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제게 가만히 속삭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의 일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날, 독일군과 영국군이 서부 전선의 참호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은 '고요한 밤'(Stille Nacht)을 부르기 시작했고, 곧 영국군도 자신들만의 캐롤을 부르며 참호에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양측 군인들이 참호에서 나와 '무인의 땅'에 모여 음식, 담배, 기념품 등 작은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들은 전사한 군인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까지 거행했으며, 인류애를 공유하는 이 순간에 양측은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1914년의 크리스마스 휴전은 희망과 선의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으며,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공유된 인간의 가치와 연결이 갈등을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책, 영화, 노래를 통해 기념되며 지금, 이 순간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제목의 책을 쓴 스님도 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게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휴식도 되어주고 빵도 되어줍니다. 저는 심지어 기도 시간에도 머리로는 강론 준비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하심을 알아들읍시다. 그제야 비로소 휴식 같은 생명의 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저절로 자라나고 저절로 부풀게 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