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모든 가르침이 마음의 안식으로 수렴하면 부모가 맞다> 복음: 마르코 2,23-28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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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안식일법’의 참 의미를 알려줍니다. 안식일법은 비록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지만,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율법이었습니다. 안식일법을 어기면 사형이었습니다. 쉬지 않는다고 사형시키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안식일인데도 일합니다. 배가 고파서 남의 밭의 밀이삭을 뜯어 먹은 것입니다. 밀이삭을 뜯는 행위는 추수 행위이기 때문에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도둑질보다는 안식일법의 위중함을 감안해 안식일법을 위반하는 제자들을 둔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모든 잘못을 하는 당신 제자들과 당신 자신을 두둔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안식은 아무래도 평화나 평안, 혹은 보호받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아이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게 되는 감정이 안식입니다. 안식의 반대말은 불안입니다. 부모가 절대 자녀들에게 주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 불안입니다. 불안하면 자녀가 악해져서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이킹은 왜 생겼을까요? 불안 때문에 생겼습니다. 춥고 척박한 산악지방에 인구가 늘어나니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나가 남의 나라를 약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행위는 그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 같이 사회생활에 부적격자들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특정한 물건에 집착하거나, 폭력적으로 되고, 도둑질과 타인을 괴롭히는 일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한 가지 원인은 ‘불안’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많은 율법을 줍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아이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지 않고 불안만 가중시킵니다. 사실 부모가 아이들을 평화롭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본인들이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통해서 자기 평화를 찾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모기에서 모기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교회에는 없을까요? 고해성사 보러 들어왔을 때 사제가 신자들을 야단치고 불안하게 하면 될까요? 주일미사에 일하느라고 바빠서 못 왔는데 야단치면 될까요? 주일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세상 걱정을 잠시 잊고 하느님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정해주신 날입니다. 그러니 일에서 쉬면서 평화를 찾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미사 때 어떤 복사들은 틀릴까 봐 두려움에 떱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질 때 아이들이 더 평화를 느끼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른들도 성당에 오면 세상 어디에서 느낄 수 없는 안식을 느껴야 합니다. 걱정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착해집니다. 이것이 창조자가 있음을 믿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찾을 때 부모는 바로 이 평화를 주는 존재입니다. 안식을 주는 존재가 부모이기에 불안을 조장하는 부모는 아이들이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신자들에게 밀쳐져서는 안 됩니다. 율법주의나 형식주의가 만연해지면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냉담률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아기의 참 엄마를 찾는 과정에서 아기를 반을 잘라서 두 어머니에게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진짜 어머니는 차라리 아기를 다른 가짜 어머니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짜 어머니는 자기 아기가 죽었으니 그 아이도 반이 잘리는 것을 원합니다. 솔로몬은 아기의 안식을 걱정하지 않는 자는 어머니가 아님을 분별해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교회에 하느님을 아버지요, 창조자로 믿게 하려면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율법이 신자들에게 마치 레베카가 야곱에게 에사우의 옷을 입히고 걱정하지 말고 에사우라고 우기라고 한 것과 같은 평화를 주는 가르침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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