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사랑의 법 “예수님은 분별의 잣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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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 작성일07:40 | 조회수62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2025.1.22.연중 제2주간 수요일
히브7,1-3.15-17 마르3,1-6
사랑의 법 “예수님은 분별의 잣대”
사랑하기에도, 기도하기에도, 공부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입니다. 아깝게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때로는 잠자는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안남은 인생휴가인데 새삼 무슨 휴가인가 하는 생각에 휴가를 접은지 수십년이 지났습니다. 내 인생 마치는 날 천상병 시인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먼저다”, 옛 대선 후보의 모토가 생각납니다. 어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람이, 사랑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사람을, 사랑을 중심에 놓고 보면 결론은 단순명쾌하게 나옵니다. 전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의 선언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에 대한 분별의 잣대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했는가? 생각하면 역시 답은 자명해집니다.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분별의 잣대 예수님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슷한 사례가 이어집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주변의 경계하는 시선에 아랑곳 없이 그 고유의 자유로운 처신으로 두려움없이 용기있게 한쪽 손이 오그라든 불쌍한 사람을 주시하며 말씀하시니 첫눈에 들어온 불구의 사람입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서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좌절과 자존감의 상실로 위축된 모든 이들이 그 악순환의 사슬을 끊고 분연히 일어나 예수님 앞에, 삶의 중심 자리에 서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정신 번쩍 들게 하는 늘 화두처럼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이어 주님은 바리사이들에게 양자택일의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선이나 악이냐? 살림이냐 죽임이냐? 선택해야 하고 답은 이미 제기하는 물음 안에 있습니다. 양비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는 교황님 말씀도, ‘선을 행하라’ 무수히 말하는 시편도 연상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부터 불순했고, 상식도 양심도 오염되어 있어 올바른 분별을 못합니다. 비열하고 비겁하며 애당초 정직성과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으니 말그대로 인간실격입니다.
이들은 묵묵부답 입을 열지 않았고, 주님은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 보시며,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몹시 슬퍼하십니다. 정말 완고한 마음 역시 마음의 중병입니다. 그동안 무수히 들어 온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시편 말씀도 생각납니다. 수행의 노력을 게을리하면 세월 흘러가면서 마음은 절로 편협해 지고 굳어지고 쪼그라들기 마련입니다. 주님께는 사람이, 사랑이 먼저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즉각적인 사랑의 명령입니다.
“손을 뻗어라.”
이또한 마음이 오그라든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흡사 “마음을 뻗어라, 마음을 활짝 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마음역시 오그라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해집니다. 손과 더불어 오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져 심신이 치유되었을 불구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실정법을 초월하는 두 가지 원칙을 배웁니다. 더 큰 선이 거부되지 않는 한, 선을 행하는 것은 항상 정당화 된다는 것이며, 진실로 사랑에 찬 행동은 비록 법을 위반하더라도 결코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의 법앞에 모든 법은 상대화됩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사랑이 아닌 안식일법이 절대화되고 있음을 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 역시 절대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사랑의 법에 따라 주일을 못지킬 수도 있는 것이니, 새삼 사랑이, 예수님 마음이 최종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마음에 정통해 있었듯이, 예수님 마음에 정통해 있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3,2)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밝힙니다. 새삼 사랑밖에 길이 없음을, 답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착한목자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둘이자 하나인 ‘착한목자’이자 ‘대사제’가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입니다. 히브리서가 시편110장 4절은 근거로 옳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너는 멜키세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하고 성경에서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은 예수님처럼 ‘목자’이자 ‘사제’로서의 둘이자 하나인 신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목자직의 영성과 사제직의 영성을, 사랑과 섬김의 영성을 배우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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