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활묵상 : 하느님 안에서 가난과 지지리 궁상은 다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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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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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25 | 조회수63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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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쪽지를 보내셨습니다. 베드로 형제가 생각하는 가난은 무엇인가요? 저는 정답은 알지 못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정답은 있어서 간단하게 답변드렸습니다. 그 내용을 기초로 해서 그럼 제 생각을 공유하겠습니다. 제가 올린 글 '평생을 가난하게 사신 교황님 존경합니다'의 글에서 보면 제가 그랬습니다. 남기신 재산이 고작 100달러라고 했습니다. 사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그때 장문의 글을 남기고 싶었는데 개인적인 일 때문에 여유가 없어 폰에서 카톡 창에 간단히 올렸습니다. 지금도 톡에서 올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재산 그걸로 가난하게 사셨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이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하나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또 일부분만 보면 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 전체를 놓고 우리가 역사적으로 평가를 할 때 단순히 그 순간만 놓고 판단하지 않듯이 교황님께서 사신 일생의 삶도 이렇게 전체 틀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가난을 서약했다고 해서 이건 교황님을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 모든 성직자분을 가리킵니다. 지지리궁상 같이 사시는 걸 과연 가난한 삶이라고 생각할까요? 저는 만약 신부님들이 서약하실 때 그런 의미로 만약 가난을 이해하고 그 길을 가신다고 한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걸 원치 않으실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난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가난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가난을 존경의 잣대로 본다면 그건 어쩌면 말없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분수에 맞지 않게 소유하는 걸 가난과 반대의 개념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마치 우리 사회에 최저시급이라는 제도가 있는 것처럼 사람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저 한도의 시급 규정처럼 가난도 그런 것입니다. 그 이하의 가난은 그런 가난은 결코 존경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그런 가난이 존경의 대상으로 전락된다면 이 세상에 그 어떤 누가 그런 길을 가려고 하겠으며 저라도 그런 길을 가라고 한다면 손사래를 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가난 하면 사람들이 어떤 물질 세계인 경제 관념과 대비시켜 생각하는데 우리가 종교에서 말하는 가난은 그런 의미도 포함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 자체에서 나오는 가난의 영성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할 때의 가난은 물질의 가난을 의미하지만 교황님을 지칭해서 가난하게 사셨다는 건 물질과 정신 모두를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그럼 정신은 어떻게 가난할 수 있는가 하는 게 이해가 가시는지요? 그건 바로 욕심과 탐욕 같은 것의 절제입니다. 사실 물질적인 가난을 선택해 가난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에서부터 이와 같은 가난한 영성을 갖지 못하게 되면 절대 그런 가난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건 또 하나,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다고 해서 그런 가난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아뇨, 흉내는 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불가능합니다. 그건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그런 가난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난을 선택한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 같냐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가난을 선택해 그 삶에 만족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만족하며 살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그런 분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얄팍한 개념의 가난을 초월한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이런 삶은 감히 흉내도 내기에도 벅찬 삶입니다.
바로 진정한 가난은 겉으로 드러나는 궁색한 가난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그 외에는 다 포기할 수 있는 삶이 하느님 안에서 진정으로 가난한 삶을 산다고 할 때의 가난한 삶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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