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학자 기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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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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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29 | 조회수212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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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간 화요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학자 기념] 요한 3,7ㄱ.8-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과 니코데모 사이의 담화가 이어집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던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함을 강조하셨지요.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자신의 뜻과 고집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명으로 그 말씀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 순명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큰 사랑과 은총에 힘 입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내 안에 모셔들여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새롭게 보게 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서 세상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통해 내가 변화되기에 내 눈에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에 의해 우리가 내적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바람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바람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불고 싶은데로’ 붑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분의 섭리 안에서 움직이지요. 하느님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 새로 태어난 이들도 그와 같아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 휘둘리거나 사람들 눈치를 보지 말고, 우리를 하느님 뜻에 맞는 올바른 길로 이끄시는 성령의 바람에 나를 내맡겨야 합니다. 성령의 세찬 바람이 나를 언제 어디로 이끌어가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의 상황에 머물러있고 싶어도 성령께서 ‘때가 되었다’고 하시면 일어서야 하고, ‘자! 가자’ 하시면 따라나서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런 우리 삶이 답답한 구속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지요. 세상 것들을 욕심내지 않으니 가벼워지고,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않으니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 참된 자유 안에서 세상과 삶을 바라보면, 그토록 힘들고 괴롭던 십자가가 사실은 가장 큰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토록 지루하고 고달팠던 일상의 매 순간이 기적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값진 보물은 돈과 재물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형제들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기만 하면 그분께서 내가 청하는 그대로 이뤄주신다고 믿는 건 참된 믿음이 아니지요. 참된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마저 기꺼이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믿고 그 사랑 안에 머무름으로써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구리뱀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구리뱀’이라는 표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충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변치않는 당신 사랑을 보여주신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희생과 죽음을 통해 하느님께서 맡기신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당신 사랑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이지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주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친교가 바로 영원한 생명인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영원한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실천을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즉시 실천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온전히 누려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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