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박해에서도 정통 교리 전파를 /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0502](마태 10,22-25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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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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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5-01 | 조회수45 | 추천수1 |
반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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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박해에서도 정통 교리 전파를 /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0502](마태 10,22-25ㄱ) 아타나시오 성인은 295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가정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특히 성경과 신학 분야에 뛰어났다. 318년에는 부제품을 받고 자신의 고향에서 알렉산데르 주교 비서가 되었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했던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알렉산데르 주교를 수행해 참석했다. 아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 사상이다. 3년 뒤 알렉산데르 주교가 선종하자 후임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성인은 곧바로 이집트 이단인 아리우스파의 심한 반발에 직면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해당 세력들 뒤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원이 있었다. 결국 아타나시오는 335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로 첫 번째 유배를 떠났다. 2년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하고는 콘스탄티누스 2세가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새 황제는 아타나시오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나서 다음 해에 교회 회의를 개최해 그의 직위를 복권했다. 그러나 반대파에 의해 성인은 얼마 뒤 재차 추방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에서 7년 동안 더 머물러야 했다. 346년부터 356년까지는 성인에게 있어 가장 평화로운 기간으로, 그의 주요 저서들은 이때 나왔다. 이 기간 그는 이집트의 은수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 거기서 황제가 죽기까지 자신의 교구민을 지도했다. 이후에 그는 짧은 기간이지만 두 차례나 유배를 가게 됐고, 366년이 돼서야 선종까지 평화롭게 교구를 다스리며 사목할 수 있었다. 아타나시오는 저술과 강론을 통해 지난날의 갈등과 폭력으로 인하여 피폐한 교회를 재건하고,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 데 주력했다. 아타나시오는 신체적으로는 작았으나 내면적으로는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문하기로 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데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평신도들은 물론, 수많은 주교들조차 주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요한 헨리 뉴먼 성인의 말대로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가 되었다. 또한 아타나시오 주교학자 성인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저서를 많이 남겼다. ‘안토니오의 생애’를 비롯해 성경 주석, 시편 주해 등이다. 유배 중에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보낸 해명’, ‘수도자들에게 보낸 아리우스주의의 역사’ 등이 있다. 아타나시오는 대 바실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성인과 함께, 동방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분으로 추앙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박해를 각오하라며 타일렀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미움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면 구원 받는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너희가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내가 올 것이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295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타나시오 성인은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328년 알렉산데르 대주교의 후계자가 된 뒤, 아리우스파에 맞서 싸우다가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정통 신앙을 해설하고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수도 생활에 상세 내용을 서방 교회에 전하기도 하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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