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학자 기념] | |||
---|---|---|---|---|
작성자박영희
![]() ![]() |
작성일2025-05-02 | 조회수80 | 추천수3 |
반대(0)
![]() |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학자 기념] 요한 6,1-15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주 적은 양의 빵으로 수천 명의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빵을 가지고 일으키신 놀라운 사건, 즉 ’기적’으로 바라보는 반면, 오늘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표징’으로 바라봅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던지시는 질문과 답변, 그리고 이어지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당신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참된 빵이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빵을 어디에서 구해야 할지를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니지요. 우리가 빵을 어디에서 구해야할지, 누구에게 청해야 할지를 제대로 알도록 주의를 환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빵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물으시는데, 그는 빵이 얼마나 필요하겠는지 그 ‘양’을 계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 점은 안드레아도 마찬가지지요.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며 빵의 수량만을 따지고는, 자신들이 가진 그 적은 양의 빵은 저 많은 군중들을 먹이는데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다시 말해 자기들 능력으로는 저들을 먹일 수 없다고 결론 짓습니다.
이는 우리도 자주 저지르곤 하는 잘못입니다. 세상이 정한 기준에 따라, 인간적인 셈법으로 계산하려고 하다보니 정작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몰라봅니다. 일단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적극적으로 따르며 부족한 부분은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면 알아서 충만하게 채워주실텐데, 제 뜻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제 힘과 능력으로 해내보겠다고 낑낑대니 항상 부족하고 불완전한 겁니다. 그러니 고집과 교만을 내려놓고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가진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내어드리니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의 은총과 힘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 완전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눠주시기 전에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은 우리에게 그런 점을 깨닫게 하시이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많고 적음을 당신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하실 일이 가능할지 아닐지를 당신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여 그분의 일을 하신다면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 믿으셨습니다. 선 자체이신 그분께서 전능하신 당신 권능으로 인간적인 부족함을 채워 완전하게 만드실거라고 믿으셨습니다. 그 믿음과 순명의 결과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나 되는 음식이 남았습니다. 제자들이 ‘빵’이라는 세상의 가치에 골몰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하느님을 바라보며 기도하셨기에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우리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느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시간 그 자체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 우리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만나면 우리를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선한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꾸준하고 열심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 안에 머물러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