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4주일 다해, 성소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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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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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5-11 | 조회수32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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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4주일 다해, 성소주일] 요한 10,27-3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전래동화 <햇님달님>을 보면 어머니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그 자식들까지 잡아먹기 위해 집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그들의 어머니인것처럼 목소리까지 흉내내며 방문을 열어달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 안에 있던 오누이는 호랑이의 목소리에 쉽사리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평소에 들었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어떤 점이 다른지 꼼꼼히 비교해봤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틈으로 손을 내밀어보라고 하는 등 자기 어머니를 제대로 식별하기 위한 다른 증거들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뻔한 첫번째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오누이를 쫓아갔고 막다른 길에 몰린 오누이는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그들에게 동아줄을 내려주었는데, 그 줄을 붙잡고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 중에 동생은 해가 되었고 오빠는 달이 되었지요. 이 이야기는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목소리가 멸망으로 이끄는 목소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제대로 식별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나를 참된 행복과 완성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오롯한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준비하는 ‘성소주일’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야 나를 부르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볼 수 있고, 그분 말씀을 순명과 실천으로 따라야 그 말씀 안에 담아주신 은총과 복을 누릴 수 있는 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있는 회당에 방문하여 그곳에 있던 유다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이 바로 유다인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생각만 옳다는 교만과 독선으로 인해 마음이 닫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교회 공동체가 자기들이 믿는 유다교 공동체보다 더 융성하는 모습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은총과 축복을 베푸시는데,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보며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자기 고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그러질 않으니 문제입니다. 그릇을 뒤집어 놓으면 빗물을 받을 수 없듯이,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열려있지 않으면 그분께서 주시는 사랑과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없는 법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지 말 지는 각자의 자유지만, 그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는 꼴이니 결국 자기만 손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온 마음을 기울이며 귀를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소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돈이 최고라는 목소리, 명예를 쫓으라는 목소리, 높은 자리에 올라 남들 위에 군림하라는 목소리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는 당장 우리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겠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며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기에 하느님의 목소리에 신경쓰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한 내 안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소음도 문제입니다. 나를 좀 알아봐주고 인정해달라고 부르짖는 관심과 인정의 목소리, 상처받고 무시 당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펄펄 끓는 분노의 목소리,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낮은 자존감의 목소리 등이 마음 속에 가득차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리 마음 깊은데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소음들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식별하여 들으려면 먼저 자기 생각이나 고집을 내려놓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또한 평소에 꾸준한 기도와 성실한 신앙생활 그리고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씩 알게되고, 그분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하나씩 깨닫게 되며, 그렇게 알고 깨닫는만큼 하느님과 나 사이에 사랑과 신뢰도 점점 더 깊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그분을 따르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과 서로를 알아감으로써 깊은 친교를 맺은 이들이 당신을 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현실은 그분 말씀과는 좀 다릅니다. 예수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분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많은 겁니다. 그건 그 말씀에 담긴 뜻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기름진 고기를 배불리 먹고 단술을 양껏 마시며 즐겁게 살고 싶은데, 별로 맛도 없고 심심한 천상의 음식을 먹으라고 주시고, 세속적인 즐거움을 포기한 채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만 하는 답답하고 힘든 삶을 살라고 하시니 그런 어려운 요구를 하시는 주님을 굳이 따르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양은 자신을 이끌어주는 목자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시력이 안좋아서 눈앞에 있는 장애물조차 피하지 못하고, 몸이 둔해서 실수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누가 일으켜주기 전에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부족하고 약한 존재이기에 옆에서 이끌어주고 지켜주는 목자가 꼭 필요하지요. 그러니 양은 말 그대로 “죽기살기로” 목자를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런 점은 참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악의 수렁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구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지요. 그러니 ‘난 주님 없으면 안된다’는 간절함으로, ‘주님에게서 멀어지면 죽는다’는 비장한 각오로 주님 뒤를 열심히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보살핌과 보호 속에서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고 참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또한 그 어떤 악의 세력도 우리를 주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에게서 떨어져나가지 않고 그분 품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 따로 시간을 내어 ‘외딴 곳’을 찾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깊이 머무르며 그분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귀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가는 이 길이 그분 뜻에 맞는지를 올바르게 식별하여 엉뚱한 길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기 전에 단 몇 분이라도 성경을 읽으며 그 안에 담긴 하느님 말씀이 내 마음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깊이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깨달은 말씀의 의미를 다음 날 하루 동안 삶 속에서 실천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며 그분께서 내 삶에 일으키시는 놀라운 변화를, 그분 사랑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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