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지금 고통일지라도 예수님께서도 겪으신 것이기에 / 부활 제5주간 토요일(요한 15,18-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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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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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5-23 | 조회수38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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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지금 고통일지라도 예수님께서도 겪으신 것이기에 / 부활 제5주간 토요일(요한 15,18-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포도나무임을 비유하시고는 계속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희보다 나를 더 미워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너희를 사랑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를 뽑았기에 그들도 너희를 미워한다. 그들이 나를 박해하기에 너희도 박해한다. 그들이 내 말 지키면 너희 말도 지키리라. 그들은 내 때문에 모든 일을 저지른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마저 알지 못하기에.” 세속의 일들은 속도로 경쟁하는 지경이다. 가끔은 결과보다는 빠를수록 박수를 더 받으니, 어느 새 빠른 건 좋고 느린 건 나쁜 게 되었다. 그러나 빠른 건 그저 빠른 것일 뿐, 좋고 나쁜 게 아니다. 느린 것 역시 그저 느린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일등은 영웅이고 이 삼등은 시큰둥이다. 금메달에만 국가가 연주된다. 글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이다. 이것이 인생이리라. 사실 빨리 뛰면 빨리 망가지리라. 삶에도 제동을 위해 한번쯤 멈추어 돌아 볼 여유를 가지자. 흔히들 우리가 종교를 갖는 이유는 삶의 현실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란다. 어쩌면 종교는 하나의 진통제 같은 역할을 한다나. 그러나 진실로 믿는 이에게는 이 주장은 그릇되다. “내가 너희를 뽑았기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면 세상 미움을 받는다나. 그러면 세상은 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미워할까? 그분 가르침이 세상 것과 다르고 그릇된 가치관과는 결코 타협될 수 없기에? 그래서 예수님 가르침이 되레 불편하게 만든단다. 솔직히 말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삶으로 세상의 미움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적당히 얼버무리며 타협해 가면서 편하게 살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며 권모술수와 권력층의 감추고 싶은 부분을 거리낌 없이 폭로했다. 이것이 당시 지도층을 불편하게 했단다. 그리하여 그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독약을 마셔야만 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산다. 다만 현대인들은 행복에 대한 권리를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가 동등하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시대보다도 분명히 자각한다. 그러기에 행복하지 못하면 상실감을 가진다. 그렇지만 '죽으면 살리라!'라는 부활의 역설을 몸소 체험하는 신앙인들은 세상에 대해 할 말이 있다. 행복을 목말라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신만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갈증을 달래려 바닷물을 마시는 것이리라. 전능하신 분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불편과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기 길 가는 이는 참 행복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종종 비판과 반대가 강해 어려움도 겪는다. 그게 종교적 신념이라면 더 큰 저항이 될 게다. 종교는 절대적 가치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기에. 예수님을 믿기에 신앙을 선포하다보면 때로는 믿지 않는 이들의 반대와 비방에 맞서기도. 그러니 자신의 뜻과 다른 일을 겪을 때도 결코 좌절하지 말자. 그것이 성령께서 이끄시는 길이라며 나아가자. 이런 당당함은 자신이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 없이는 생길 수 없다.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한 일만 생겨야 하는데, 여전히 왜 고통이 많은지 묻는다. 이처럼 믿음은 언제나 역설적이다. 믿음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장차 주어질 희망을 저버리지 말라는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안겨준다. 참는 기다림이다. 그래서 때로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세상살이에 걸림돌이더라도, 그 길이 그분께서 가신 길임을 믿기에 걷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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