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양승국 신부님_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할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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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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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9:05 | 조회수27 | 추천수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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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에 성 도미니코 사비오가 있다면, 예수회에는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1568-1591)가 있습니다. 둘 다 천사같이 살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성인들입니다. 알로이시오는 23세의 나이로 아깝게 요절한 성인입니다. 그는 좋은 배경의 가문, 사랑하는 가족들과 그들이 기대, 장밋빛 미래, 타고난 좋은 품성...이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따라가기 위해 가난한 수도자의 길을 선택한 특별한 젊은이였습니다. 너무나 빛깔이 곱기에, 그 향기가 황홀하기에 다른 젊은이들이 정신 못 차리고 멸망의 문을 향해 걸어갈 때, 알로이시오는 끝도 없는 고행과 대담한 극기, 철저한 자기관리로 좁디 좁은 생명의 길을 홀로 걸어갔습니다. 신앙심이 각별했던 어머니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은 알로이시오는 어린 시절, 자주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으슥한 곳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한 채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답니다. 커가면서 알로이시오는 남달랐습니다. 다들 어떻게 하면 잘 놀고, 잘 먹는가에 몰두하던 다른 젊은이들과는 달리, 어떻게 하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분출하는 분노하는 마음, 조급한 마음, 불평불만을 털어놓고 싶은 심정을 자제할 수 있겠는가 고민하고 필사적인 노력을 거듭했답니다. 일찌감치 구도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알로이시오의 입에서는 “내 주 하느님이여, 저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하는 화살기도가 끊임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알로이시오의 좋은 품성, 총명함, 탁월한 출신 배경을 눈여겨본 여러 주교님들은 그를 자신들의 사제로 만들려고 무척 애를 쓰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수도자로 한평생 살아가기를 간절히 염원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가장 신생 수도회였던 예수회에 입회하게 됩니다. 예수회에 입회한 알로이시오의 겸손의 덕행은 얼마나 빛을 발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대단한 가문에서 온 지원자란 말을 할 때 죽기보다 싫어했답니다. 그는 출신 배경이 보잘것없는 지원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노숙자 차림으로 구걸을 청하러 가기를 아주 기뻐했습니다. 1590년,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창궐하게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한 기근까지 닥쳐왔습니다. 1591년 흑사병이 로마를 휩쓸자, 예수회는 자체적으로 병원을 개원하였고, 총장을 비롯한 예수회 회원들이 직접 구호 활동에 나섰습니다. 알로이시오도 구호대열의 가장 선봉에 서서 환자들을 직접 업고 다니고, 손수 씻기는 등 간병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그도 흑사병에 감염되었고, 석 달 가량 병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알로이시오가 우리에게 남겨준 빛나는 덕행들 가운데서 천사와도 같은 정결, 현세의 재산, 명예, 향락에 대한 완전한 이탈, 왕성한 보속의 정신은 유난히 돋보이는 덕행이었습니다. 알로이시오의 엄격한 참회 생활은 동료들 사이에서 유명했습니다. 1주일에 나흘은 빵과 물만을 먹었습니다. 나머지 사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 와도 자신의 침실에는 전혀 불을 때지 않았습니다. 잠도 절대 많이 자지 않았습니다. 그 피 끓는 청춘의 젊은이가 오로지 주님 생각만으로 하루 온종일을 보냈습니다. 주님 앞에 늘 깨어있기 위해 수시로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오직 주님하고만 지내기 위해 철저한 고독 속에서 기도했습니다. 끔찍한 병고에 시달리던 시절,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알로이시오가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서 그의 덕행이 얼마나 탁월했던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존경하올 어머니, 우리의 이별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 우리 구원이신 주님과 결합하여 불사불멸의 끝없는 기쁨을 누리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미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2025년 6월 21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_조명연 신부님
1911년 노르웨이의 아문센과 영국의 팰컨 스콧 경이 남극 정복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두 팀은 너무나 상관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스콧은 탐험에 나섰던 72명 전원이 사망했지만, 아문센의 탐험대는 대원 1명이 썩은 치아 하나를 뽑은 것 말고는 큰 부상 없이 남극을 정복하고 전원이 무사히 귀환한 것입니다.
조건은 영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스콧 탐험대가 월등하게 좋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지원이 한참 부족했던 아문센의 이름이 역사 안에 남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문센은 에스키모의 여행법과 남극 지역을 여행한 사람들의 경험담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탐험 장비와 루트를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스콧은 전혀 답사를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냥 열심히 최선을 다해 준비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낙관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막연한 낙관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을 막연하게 잘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혀 어떤 준비도 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뜻만을 따르려고 합니다. 세상의 재물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섬기다’라는 단어는 노예처럼 복종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재물 중, 무엇을 주인으로 여겨서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주인으로 여겨야 할까요?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입니까?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결정짓는 주님이십니까?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를 너무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많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물질적인 가치의 위세가 대단하기에, 이 가치를 따르지 못하면 제대로 살지 못할 것만 같은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의 결과만을 바라보면서, 순간의 만족과 풍요로움을 주는 물질적인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느님께 대한 우선순위는 늘 뒤로 밀립니다.
주님께서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느님께 철저하게 의탁하는 삶, 그래서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먼저 찾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 사이에서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주님을 굳게 믿고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삶에서 가장 순수했던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가라(네이션 사와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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