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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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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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28 | 조회수158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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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주보에 ‘치유를 위해 기도를 청하는 명단’이 있습니다. 작년에 와서 명단을 매주 읽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을 회복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떤 분은 하느님의 품으로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고통’의 원인도, 고통의 크기도 다양합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아버지와 아들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몇 번의 수술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아들도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걷고 있습니다. 근육 무력증이 찾아와서 지금은 손가락만 움직이는 형제님도 있습니다. 형제님은 눈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30년 넘게 신장 투석을 하는 자매님도 있습니다. 늘 자매님의 투석을 도와주었던 형제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 품으로 가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사랑하는 아내의 투석이 걱정된다고 하였습니다. 30년 넘게 간 이식을 기다리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기적적으로 기증자가 나타났고, 30년 만에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매 주일 ‘치유를 청하는 명단’을 읽으면서 주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청합니다. ‘고통’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성경이 있습니다. ‘욥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고통이라는 손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병든 가족을 돌볼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또는 이유도 모르게 마음이 짓눌릴 때,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욥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병까지 얻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말합니다. “분명히 네가 잘못한 게 있겠지. 하느님은 공정하시니까 너의 죄를 벌하시는 거야.” 이런 논리를 ‘상선벌악’과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욥은 말합니다. “나는 결백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친구들의 신학을 거부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고통은 반드시 죄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연의 신비, 창조의 위대함을 보여주시며 인간의 지식과 이성의 한계를 일깨워 주십니다. 이 말씀은 고통의 이유를 가르치기보다는,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더 큰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부재하시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신앙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복을 거두어 보십시오. 그러면 저주할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시던 분도 주님이시요, 거두신 분도 주님이시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 고백은 인간의 연약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느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는 나에 대해 올바르게 말하지 않았다”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욥에게는 다시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외적인 복이 아니라, 욥의 내면에 있었습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대면하였고, “귀로만 듣던 주님을 이제는 눈으로 뵙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통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욥처럼 이해 안 되는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 실망하거나, “왜 하느님이 이러시나!” 하고 하느님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욥은 끝까지 하느님께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하느님을 향해서 울고, 따지고, 물어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사람은 “먼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맡겨라. 너는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먼저 따지고 계산하는 길이 아니라, 먼저 따르는 길입니다. 조건 없이, 계산 없이 하느님을 믿는 길, 바로 욥이 걸었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때때로 욥처럼 이유 모를 고통을 겪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 저는 지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삶 속에 이유 모를 일들이 많지만, 그 순간마다 더 깊이 하느님을 만나고, 더 깊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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