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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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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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29 | 조회수56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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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마태 16,13-19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가톨릭 교회를 떠받치는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두 사도의 삶과 신앙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단단한 바위, 즉 ‘반석’을 떠올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믿음을 단단한 반석으로 삼아 그 위에 교회 공동체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그 말씀을 듣자마자 바로 바위가 된 것이 아니지요. 그의 믿음은 여전히 약했고, 마음은 쉽게 흔들렸으며, 두려움에 못이겨 주님을 배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모든 어려움과 고난 속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았고, 그렇게 조금씩 진짜 바위다운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우리가 산행하면서 보는 바위도 처음부터 단단한 바위였던 게 아니지요. 흙 위에 또 다른 흙이 쌓이고 또 쌓이면 제일 아래에 있는 흙은 위에서 내리누르는 강한 압력을 받게 되는데, 그렇게 수천 수만년의 세월 동안 그 압력을 견디면서 점점 단단해져 돌이 된 겁니다. 그런 모습은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받는 즉시 굳건한 믿음, 성숙한 신앙이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나에게 좋은 일만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틀 안에서 실패와 좌절의 무게로 다져지고, 고통과 시련의 열기로 정화되면서 조금씩 그리스도인답게 변화되어갑니다.
주님께서 당신 양들을 돌볼 목자로, 또한 이방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로 뽑으신 베드로와 바오로도 그런 과정을 거쳐 사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먼저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남들 앞에 내세울만큼 특별한 능력도 없고, 인간적인 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당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따르는데에 어려움을 겪었던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수제자’로 발탁하신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자기 잘못을 성찰하고 뉘우칠 줄 아는 겸손함과 열린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세 번이나 부정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런 나약하고 비겁한 자기 모습이 부끄럽고 한심하게 느껴져 눈물을 쏟기도 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베드로는 통회의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며 주님께로 마음을 되돌렸고, 그분의 자비를 온전히 믿으며 자신을 의탁할 줄 알았던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그의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베드로를 제자단을 이끌어갈 대표로 뽑으신 것이지요.
다음은 바오로의 경우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여러모로 부족한 ‘평균 이하’의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시더니, 나중에는 율법과 유다교에 대한 타오로는 열정으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사울’을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그릇’으로 뽑으셨으니 말이지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사도로서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열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러셨을 겁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지요. 사울이 그토록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며 박해한 것은 유다교와 율법에 대해 자꾸만 의구심을 품는 자기 모습을,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이끌리는 자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센 척’을 한 것이 아니었나싶습니다. 그랬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마자 그분께 순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미움과 분노라는 잘못된 방식으로 타오르던 그의 마음 속 열정이 당신을 향한 사랑과 복음 선포에 대한 열망으로 제대로 타오르도록 그 방향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렇게 그는 이름도 ‘바오로’로 개명하고 180도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못살겠다던 그가 이제는 예수님 없이는 못사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전부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성경 말씀 안에서 두 사도에게 그런 변화가 일어난 맥락을 짚어봅니다. 먼저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머리로 명확하게 이해해서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이끌어주시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살아있는 신앙고백’이었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처럼 당신을 향한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참으로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한편,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감춰져있던 신비가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예수님과 관련하여 성경에서 예고하고 예언자들이 보증했던 메시아,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으로 이끄는 ‘구원자’로서의 이미지만 부각되었다면, 이제는 그런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이루고 계시는 ‘관계성’, 즉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분과 같은 본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점까지 분명히 드러난 것이지요.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비로소 완전한 꼴을 갖추게 되었고, 예수님은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의 토대 위에 당신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십니다. 즉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셨다고 믿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건 단지 우리가 당신의 신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로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에, 나의 구원과 행복에 있어 어떤 의미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그 답을 찾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또한 그 깨달음의 결과로 예수님께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당당히 고백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점에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그저 신앙고백이 아니라 ‘결의’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내 행동과 삶을 통해 “살아있는” 가르침이 되도록, 그리하여 내가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겁니다. 그래야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바오로의 경우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졌음을 알고, 이방인의 사도로 살아온 자기 삶을 돌아보며 담담하고도 당당한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바오로가 언뜻 보면 영적으로 교만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만큼 자기 소명에 최선을 다했기에,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 단 한 점의 부끄러움이나 후회도 남기지 않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또한 그런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이 주님 보시기에 부족하더라도 그분께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심판하시기보다, 최선을 다한 자신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시며 ‘애썼다’고, ’잘 했다’고 칭찬해 주실 거라고 믿었지요.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그를 위해 ‘의로움의 화관’, 즉 당신 나라에서 누리게 될 참된 영광과 행복을 미리 준비한 채 두 팔 벌려 그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겁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런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사도로서 살아오는 동안 내내 주님의 현존과 도우심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박해자들로부터 여러차례에 걸쳐 수십대의 채찍질을 당하고, 돌팔매질을 당하며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면서도 주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언제나 자신과 함께 계시면서 어떤 시련과 고통에도 좌절하지 않고 굳세어지도록 힘을 주셨기 때문임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런 깨달음을 통해 바오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지닐 수 있었던 겁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그들은 우리가 인간으로서는 한 없이 부족하고 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할 때 그 어떤 고통과 시련도 다 이겨내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자기들의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은 한없이 약하고 부족한 이들을 당신 은총과 사랑으로 채워 이 세상에서 하느님 뜻을 이룰 도구로 쓰십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달을 때까지, 고집과 교만을 버리고 모든 영광을 당신께 돌릴 줄 아는 겸손을 배우기까지 인내로이 단련하시면서 이끄시지요.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마태 16,19)를 주신 것처럼, 바오로에게 "의로움의 화관"(2티모 4,8)을 주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신의와 사랑의 선물을 주시어 완성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믿음과 희망을 마음에 간직한 채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 어떤 복된 선물을 주실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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