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참 스승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 “AI에 대한 | |||
---|---|---|---|---|
작성자선우경
![]() ![]() |
작성일2025-06-30 | 조회수36 | 추천수6 |
반대(0)
![]() |
2025.6.30.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창세18,16-33 마태8,18-22
참 스승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 “AI에 대한 유일한 대책”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사람만이 영혼이 있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챗gpt에게 없는 것입니다. 요즘 단연 화두는 AI(인공지능)입니다. 챗gpt 유료 사용자가 미국에 이어 한국이 세계 제2위라 합니다. 정말 AI의 위력이 놀랍습니다. “먼저 온 미래, AI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바둑계의 고수들도 이젠 AI에게 배운다 하며, 이세돌은 알파고에 패배한 충격으로 프로기사를 접었다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예나 이제나 늘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이 답입니다. 사랑의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함으로 참나의 주체적 삶을 사는 것이 날로 중요해집니다. 늘 주님 앞에서 깨어 참나로 당당하고 의연하고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사는 것입니다. 옛 현자의 다음과 같은 확신도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항구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두려워할 만한 것을 두려워하고, 맞서야 할 만한 것에 맞서라. 그것이 참된 용기다.”<다산> “스스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부랑자도 무섭지만, 스스로 돌아보아 옳다면 천만 명과도 맞설 수 있다.”<맹자>
이런 이들이 말그대로 천하대장부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하면 생각나는 <하늘과 산>이라는 28년전 자작 좌우명 애송시입니다. 요셉수도원에 정주하기 37년 동안 요셉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늘 바라볼 때 마다 연상되는 참 많이도 인용했던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
날로 주님과 우정의 관계도 이처럼 깊어질 때 자유롭고 자연스런 참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지상의 친구이자 제자와도 같은 파트너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하느님께서도 참 외롭고 쓸쓸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모세야, 모세야!” “사울아, 사울아!”등 주님께서 친숙하게, 애정과 신뢰 가득 담아 불렀던 무수한 인물들이 생각합니다. “수철아, 수철아!” 어릴적 부르던 어머니 음성이 생각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은 늘 봐도 새로운 감동입니다. 참사람 아브라함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같습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안에 의인이 쉰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간절하고 용기있는 진정성 가득 담긴 설득력있는 기도인지요! 이어 의인 마흔 다섯, 마흔, 서른, 스물, 열 명까지 내려가고 다음 말마디로 두분의 대화는 끝납니다.
-“그 열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열 명은커녕 한명도 없어 롯 하나만 구출되고 모두가 파멸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새삼 이 세상이 존속함은 곳곳에 ‘세상 지킴이’ 아브라함같은 주님의 참제자이자 참사람의 의인들이 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참제자는 어떠해야 함을 배웁니다. 다음 두 경우는 우리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처럼 우리의 응답을 요구합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
율법학자에 대한 대답이지만 주님의 참제자가 되려는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과연 정처없는 예수님만을 정주처로 삼아 무욕과 무소유의 삶을 살 수 있는가 묻습니다. 평생 화두로 삼아 자신을 점검하면서 ‘주님을 따라’, AI에 노예되지 말고 오늘 지금 여기서, 소유가 아닌 존재에 충실한, 홀가분한 자유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을 따름의 절박성은 장례의 의무까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만큼 우선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길을 찾지 못한 이들은 물론 하느님 나라에 관심없는 온통 땅의 현실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고, 잊고 세상 것들에 노예되어 살아가는 육적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때로 살아 있는 듯 하지만 실상 죽어 있는, 좀비와 유령같은 헛것 같은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참으로 깨어 살아있는 참사람 하나 찾기가 그리도 힘든 세상입니다. 주님과의 우정의 여정에 항구함으로, 주님 안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책임을 다하며, 참제자이자 참사람의 참나로 살아야 할 절체절명의 작금의 시대같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시어 우리 모두 주님의 참제자이자 참나의 의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시편103,8).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