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양승국 신부님_가난을 범죄시하고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투쟁합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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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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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30 | 조회수52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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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聖人)들이 지녔던 성성(聖性)의 덕목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극단적 청빈의 삶이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 보스코 역시 청빈한 삶과 관련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습니다. 길거리 가난한 청소년들의 보금자리 마련과 교육을 위한 모금에 전념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거금을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날 때 호주머니 속에는 동전 한 푼조차 없었습니다. 청빈 생활과 관련해서 돈 보스코께서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편리함과 안이함과 욕망이 우리 안에 자라날 때 우리 수도회는 그 갈 길을 다 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옷이나 음식이나 거처가 가난하다는 것을 세상 모두 인정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불편한 방에서, 허술한 가구를 놓고 사는 것, 검소한 의복을 사용하고, 소박한 식사를 하는 것은 청빈을 서원한 사람에게 크나큰 영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하셨을 때 청빈생활과 관련해 저희 수도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이자 ‘어머니’입니다. 봉헌 생활을 지켜 주기에 ‘방벽’이고, 성장하도록 돕고 올바른 길로 이끌기에 ‘어머니’입니다.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수도자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과 교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히고 해를 끼치는지 모릅니다.” 교회의 미래인 예비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뼈아픈 말씀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신부나 수녀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는 모습을 보면 제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제 개인비서 신부님은 어딜 가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참으로 멋져 보입니다. 고급 승용차를 갖고 싶은 생각이 떠오를 때 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단을 구성해서 3년 가까이 전도 여행을 하셨는데, 모든 것을 잘 갖춘 여행단이 아니라 하루하루 도움의 섭리에 맡기는 그런 형태였습니다. 이곳 저 곳 다니시다가 환영하면 머무시고, 여의치 않으면 노숙생활까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렇게 극단적 청빈을 사신 예수님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1) 청빈의 서원은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에게 정말이지 큰 도전이고 풀어야할 과제입니다. 청빈과 관련해서 우리 수도자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형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청빈을 외치지만 절대로 청빈한 법이 없습니다. 수도자들 역시 청빈을 서원하지만 결코 청빈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청빈을 덕을 자신의 삶과 비교해봐야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부를 죄악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된 부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이자 선물로 여기셨고, 그 축척된 부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가난을 비참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가난을 찾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가난은 자랑꺼리요 찬미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난하다보니 매이지 않고 자유로웠습니다. 사실 가난은 뭔가 결핍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비참함으로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가난입니다. 오늘날 이 물질만능의 세상 앞에 우리 수도자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가난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을 결핍과 궁핍함으로 느끼게 만드는 악령과 싸우는 일입니다. 가난을 범죄시하고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투쟁하는 일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2025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_조명연 신부님
평균 온도 섭씨 영하 55도, 공기의 주성분은 이산화탄소입니다. 당연히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고 생명에 대한 안정을 보장할 수 없는 곳입니다. 바로 화성입니다. 화성에 정착해 살아갈 주민을 뽑는다는 ‘마스원 Mars one’ 프로젝트 모집 공고에 세계 각국의 지원자가 얼마나 몰렸을까요? 자그마치 20만 명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한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으며 그곳에 남은 생을 보내야 한다는 편도 티켓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2019년 경영 주체인 마스 원 밴처스가 파산하면서 종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지원자가 몰린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인류 최초로 화성에 간다는 꿈 때문에? 새로운 시각을 꿈꿔서? 모험과 도전을 좋아해서?
꿈과 모험이 그들이 위험한 결정을 내리게 했던 것입니다. 거의 모든 과학자가 불가능하다면서 반대했지만, 생명의 위협도 그들의 꿈에 대한 희망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세상 것에 대한 욕구를 모두 내려놓고, 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선 프로젝트와 다른 것은 꿈을 향해 나아가면 지금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을 위해 당장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스승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마태 8,18)라고 말합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사람으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의 열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감정적인 헌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인 안정을 포기할 각오가 필요하시다고 하십니다.
또 어떤 이가 “먼저 가서 아버지를 묻히게 해 주십시오.”(마태 8,21)라고 말하지요. 이 요청은 율법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무이기에 매우 타당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효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마음의 열정’만으로는 부족하고, 생활 전체의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 부르심은 하느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즉각적인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을 하고 나서’ 따르겠다면서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닐까요?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도 멀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낸 발자국만으로 내 길을 만들 수 있다(김민영, 황선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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