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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아름답고 멋진 예술적 삶 “
작성자선우경 쪽지 캡슐 작성일2025-07-02 조회수28 추천수6 반대(0) 신고

2025.7.2.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창세21,5.8-20 마태8,28-34

 

 

하느님 중심의 아름답고 멋진 

예술적 삶

“AI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시야’를 지니는 것이다”

 

 

"그지없이 사랑하나이다.

 하느님, 내 힘이시여."(시편18,2)

 

'먼저 온 미래'란 책을 읽으며 마음에 와닿은 말마디들입니다.

“스마트폰 때문에 사람들의 주의력은 고갈되고 소셜미디어로 인해 우울증을 앓는 청소년들이 급증했다.”

“인공지능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집어삼킬 것이다.”

“바둑계에 인공지능이 도입되어 기풍이 사라졌다. 프로기사마다 자기만의 색깔이 있고 기풍이 있었는데 개성은 사라지고 비슷해 졌다. 개성과 다양성이 사라졌고 아름다움과 문화가, 재미와 멋이 사라졌다.”

“바둑은 예술이 아니라 승부에 집착한 스포츠가 되었다.”

 

기도(棋道)란 말이 무색한 현실입니다. 그대로 인공지능에 접수된 바둑계의 현실이 고스란히 우리의 삶에도 적용되는 느낌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가치가, 사람이 이끄는 기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결론부 언급입니다.

 

“인공지능이 아직 할 수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 좋은 상상을 하는 것, 우리가 미래를 바꿀수 있다고 믿는 것, 그리고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선장이다. 아직까지는. 과학기술의 힘을 믿는 것만큼이나 기도의 힘을 믿는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갈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이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하느님 중심의 삶일수록 온전한 인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고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멋진 예술이요 아름다운 시’입니다. 아주 예전 27년전 여기에서 썼던 ‘시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시詩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餘白의 종이 위에 시처럼

 침묵의 여백의 시공時空안에 시처럼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닌

 하느님의 시,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1998.1.24.>

 

시時는 시詩입니다. 매순간 시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주인이 되어 인공지능을 종처럼 부릴 수 있습니다. 이런 소망이 고스란이 담긴 ‘산앞에서 서면’이란 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2024.9. >

 

날로 하느님과 일치된 하느님 중심의 영적 삶에 ‘하느님의 시야’를 지님이 AI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우리의 영적 삶에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는 불변의 필수적 본질적 가치입니다. 오늘 옛 현자가 말하는 바람직한 인간도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기인합니다.

 

“남의 장점을 키워주면 그 장점은 내것이 된다. 남의 단점을 조장하면 그것 역시 내 것이 된다.”<다산>

“군자는 남의 장점을 키워주고 단점은 막아준다.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논어>

 

오늘 복음의 마귀들린 사람들이 상징하는바 하느님 중심을 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제정신을 잃을 때 걷잡기 힘든 통제 불능에 사람들은 사나워지고 거칠어집니다. 인생 광야 여정중 성인, 폐인, 괴물 셋의 가능성중 하나입니다. 하느님 중심 자리에 있던 마귀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정체를 즉시 알아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저희를 쫓아나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주십시오.”

 

하느님의 깊고 넓은 시야를 지닌 예수님은 마귀의 본질을 꿰뚫어 알아보고, “가라”퇴출을 명하시니 마귀떼들은 혼비백산 도주합니다. 마귀들렸던 사람 둘은 분명 마귀들이 점거했던 중심 자리에 주님을 모심으로 제정신의 온전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나 마을 사람들은 충격을 감당치 못해 주님께 떠나 주십사 간청합니다. 

 

마귀들린 사람들은 하느님 중심 자리를 비워뒀을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늘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의 시야를 지니고 살 때 마귀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호시탐탐 우리 삶의 중심 자리를 노리는 악마들입니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결코 믿음의 여정에 완성된 인간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첩첩산중입니다. 계속되는 난제들이라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100세에 약속의 아들 이사악을 얻었습니다만 사라의 강권으로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를 쫓아낼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을 것입니다. 문제 해결사처럼 위기때 마다 하느님은 나타나시어 아브라함의 마음의 시야를 넓혀 주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대신하여 불쌍한 하갈과 이스마엘의 살길도 열어주시니 아브라함은 참으로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지혜로우신 하느님의 마음을 깊이 배워가며 믿음과 더불어 그의 시야도 하느님의 시야를 닮아 날로 넓어지고 깊어졌을 것입니다. 결국 답은 끊임없는 자기초월의 겸손과 비움의 삶을 통해 주님을 닮아가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처럼 삶의 모두를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배움의 기회, 공부의 기회로 삼아 구도자적 삶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게 하시고, 날로 당신의 넓고 깊은 시야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 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18,29).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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