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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5주일 다해]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5-07-13 조회수63 추천수2 반대(0) 신고

[연중 제15주일 다해] 루카 10,25-37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라는게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신이 중대한 위험이나 부담 없이 구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이지요. 이 법은 프랑스나 유럽 일부에서 채택하여 적용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구조활동을 하지 않았을 때의 처벌을 강제하는 대신,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을 통해 구조활동을 하는 사람이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발생한 피해에 대해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면책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책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구조활동에 나서도록 독려하는 겁니다. 그만큼 이 법의 적용에 논란이 크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법적으로 처벌을 받아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인지, 구조활동을 하든 하지 않든 그 결정은 개인의 자유에 맡겨야 하는게 아닌지, 법적으로 처벌받는 것이 두려워 마지 못해 선을 행하는 것을 참된 의미의 선행이라고 볼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고 이해하고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그분께 질문하지요.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에게 아주 교과서적인 대답을 해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무엇이 하느님 뜻에 맞는 옳은 것인지 알면서도, ‘말만 하면서 실행은 하지 않는’ 그들의 평소 모습을 잘 아셨기에, 유다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친숙하며 삶과 가까운 신명기의 율법부터 철저히 지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사실 그 율법교사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면서도 아는대로 실행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신 계명을 지금 즉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정도로 엄중한 ‘법’으로 생각하지 않고,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선택사항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계명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도 그것을 기꺼이, 최선을 다해 실천하여 그 유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마지못해 최소한으로만 실천하여 그 유익을 지극히 일부만 겨우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어지는 율법교사의 질문에서 그런 소극적인 마음가짐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아마도 그는 자기처럼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유다인만을 이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를 이웃으로 받아들여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인데, 그는 자기 마음에 드는 소수의 인원만을 ‘내 이웃’이라는 범주에 받아들여 지극히 제한적인 사랑을 하려고 드는 겁니다. 이 율법교사처럼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여 나와 가까운 사람,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을 이웃이라고 여기면, 사랑과 선행을 실천할 대상을 고르게 됩니다. 즉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를 꼭 도와야 할 사람, 상황에 따라 도와줘도 될 사람, 절대 돕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하려고 들기에, 기회가 왔을 때 선뜻 사랑과 자선을 실천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재고 따지느라 주저하고 미루다가, 기회를 놓치고 나서 뒤늦게 후회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는 영영 오지 않겠지요. 그러니 ‘끼리끼리’만 어울리려는 안일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내 사람’만 잘 챙기려는 이기적인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정한 기준에 맞는 사람이 내 이웃이 아니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내 이웃입니다. 심지어 그가 나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힌 ‘원수’라고 해도 말이지요. 그 점을 분명히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는 겁니다.

 

그 비유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사제’와 ‘레위인’으로 대표되는, 이웃이 처한 곤경과 아픔에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강도를 만나 입었던 옷까지 몽땅 빼앗기고, 심한 폭행을 당해 초주검이 된 채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웃의 모습을 보았음에도 그를 무관심하게 지나쳐 갑니다. 그저 ‘모른 척’하는 소극적인 모습 정도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그와 엮여서 피곤해지는 일이 없도록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이지요. “길 반대쪽으로”, 한 쪽 길 가에 쓰러져있는 사람과 최대한 먼 거리를 유지한 채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버리는 그들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까지 자아냅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겁니다. 거룩한 성소에서 제사를 집전하는 사제도, 그를 도와 성소를 정리하고 예물을 관리하는 레위인도 유다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에, 혹여 손에 피를 묻히거나 시신을 만져 율법적으로 부정한 상태가 되면 종교 예식을 진행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불편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 모두가 겪게 되겠지요. 그 점을 걱정하여 길 가에 쓰러진 사람을 못 본 체 하고 지나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작은 것을 걱정하다가 보다 중요하고 큰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은 엄숙하게 진행하는 예식이나, 거창하게 준비한 예물이 아니라 이웃에게 실천하는 따뜻한 사랑과 자비임을. 하느님은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당신께 예물을 바치는 것보다,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와 화해하여 함께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더 기뻐하심을. 오늘 복음 속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이 바로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고 따른 사람입니다. 그는 곤경과 고통에 처한 이웃을 가엾게 바라보며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여겼습니다. 그랬기에 자기 일이 바쁘다고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었지요. 즉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는 응급처치를 해 주었습니다. 그를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밤새 간호해주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기의 이틀 치 일당을 기꺼이 내어주고 돈이 더 들면 자신이 내겠다고 선뜻 보증까지 서면서 그를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고 나서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우리는 그 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끝까지 사랑을 실천한 사마리아인이 그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말이지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할 대상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좁혀, 거기에 따르는 노력과 부담까지 최소한으로 줄여보려고 하는, 우리의 옹졸하고 소극적인 마음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으로 경종을 울리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 말씀은 지켜도 되고 안지켜도 그만인 ‘권고’가 아닙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며 미루지 말고 즉시 실천해야 할 ‘법’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법’으로 여기며 기꺼이 따를 때, 나는 하느님 나라의 법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고 자연스레 하느님 나라에 속한 그분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인 우리 안에 머무르시며 우리가 실천한 사랑을 당신 은총으로 채워 완전하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우리 삶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하게 채워집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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