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성실과 겸손으로 중세 신앙을 만든 위대한 스승 / 성 보나벤뚜라 주교 학자 기념일[0715] | |||
---|---|---|---|---|
작성자박윤식
![]() ![]() |
작성일2025-07-14 | 조회수29 | 추천수0 |
반대(0)
![]()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보나벤투라는 1221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조반니 디 피단자’였으나 ‘보나벤투라’로 바꾸었다. 이는 사실 불확실한 사연이긴 하지만 보나벤투라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이름이라나. 그가 어렸을 때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중재 기도를 바쳐,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성인의 설명에 의하면 어머니는 아들을 안고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달려가 “아이가 살아나기만 하면 꼭 수도원에 보내겠습니다.” 라고 약속했다. 성인은 아이를 안고 기도하고 축복을 주었다. 그러자 아이가 살아났다. 성인은 너무 기뻐서 “오! 보나벤투라(기쁜 일이여)” 라고 외쳤다. 그때부터 ‘보나벤투라’로 불리게 되었다나. 아이가 자라자, 어머니는 성인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열일곱에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련기간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 세계 최고의 신학대학인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는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파리 대학 교수가 되었다. 보나벤투라가 신학을 가르칠 때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보나벤투라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철학, 신학, 과학 등 모든 학문에 대해 토론했고, 서로가 신앙적, 학문적 성장을 자극하고 독려했다. 성인에게는 이런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의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에게 성체 찬미가를 작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는 아마도 두 사람 작품 중에 나은 것을 택하려 한 것 같다고 다들 여겼다. 두 사람은 열심히 작사하였고, 드디어 일을 끝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을 먼저 본 보나벤투라는 “토마스의 작품이 제 작품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것을 찢었다. 이렇게 그는 겸손했다. 사실 겸손을 뜻하는 영어는 ‘humility’이며, 이 말의 어원은 ‘흙’이다. 겸손은 흙처럼 되는 거다. 보나벤투라는 ‘흙같이 겸손한 성인’이었단다. 후에 보나벤투라 성인은 파격적으로 서른다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프란치스코회 총장이 되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쓰고 수도회 회칙도 만들었다. 1273년 그는 알바노의 교구장 직책의 추기경이 되었다. 보나벤투라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성모님을 지극히 공경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성인은 매주 토요일마다 수도원 부속 성당에서 성모 찬송 미사를 봉헌했고, 성당에서 저녁 종이 울릴 때마다 정성껏 성모송을 바쳤다. 그래서 성인을 얘기할 때 꼭 기억해야 할 게 바로 ‘삼종기도’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 기도는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성령으로 인해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한 사실을 알려드린 것을 묵상하며, 아침, 낮, 저녁 세 번하는 기도다. 이것이 삼종기도의 출발이다. 멀리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밀레의 ‘만종’이 그 대표적 그림이다. 다음 해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로마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토의하려는 리옹 공의회의 의사일정을 짜도록 그를 위촉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기 중인 7월 15일에 리옹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보나벤투라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 중의 한 분이다. 그는 1482년에 교황 식스투스 4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588년 교황 식스투스 5세에게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성체와 성합 그리고 추기경 모자가 그의 상징이다.
성 보나벤뚜라 주교 학자 기념일[0715](마태 23,8-1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