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관처럼 행차하는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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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용순 | 작성일2003-06-20 | 조회수1,004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고관처럼 행차하는 신부
신부는 가난한 교우 집에서 밥 한술 얻어먹은 것이 큰 죄나 지은 것처럼 가슴이 무겁고 안타깝다. 페롱 권 신부를 모시고 있던 문 바오로 회장은 권 신부를 다른 공소로 옮기게 하려고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의 행차처럼 꾸미고 양지를 지나간다. (윤의병신부지음「은화」하권 85-89)myhome.naver,com/wngok wngok@hanmail.net
권 신부가 거처하는 집은 어느 산골 오막살이 아래 방과 윗방 두 칸이다. 권 신부는 이 집 윗방에서 같이 지낼 도리밖에 없었다. 방바닥에 깔린 헌 멍석, 일어서면 머리를 누르는 새까맣게 그은 천장, 흙벽, 빈대, 이, 벼룩, 이런 것은 도대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밥상에는 노란 조밥 아니면 꽁보리밥이요, 김치, 고추장, 된장 같은 것뿐인데 그래도 이것은 너무 지나친 대우이다. 이 집 식구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봄, 여름 내내 멀겋게 나물 죽을 쑤어 먹고사는 형편이다. 신부도 그들과 같이 먹기를 여러 번 청해 보았으나 이점만은 순명하지 않는다. 이 집 어린아이들이 제 부모가 안 보는 틈을 타 신부가 식사할 때 들어와 앉는다. 조밥 한 덩어리씩 손에 쥐어주면 꿀처럼 달게 삼키는 광경은 신부의 눈물을 자아낸다. 어느 날 밤이 꽤 깊었는데 아랫방에서는 어린아이가 배고프다고 어미를 조른다. “아까 죽 한 그릇 먹지 않았니. 좀 참으려무나.” 하고 말하면 일곱 살 먹은 놈은 여기에 불복하고 다음과 같이 칭얼거리는 것을 어찌하랴! “그까짓 것 아까 점심때 조금 주고, 저녁엔 어디 주었어? 윗방에만 올려 가고…….” 신부는 밥 한술 얻어먹은 것이 큰 죄나 지은 것처럼 가슴이 무겁고 불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처럼 군색하고 불안한 생활을 두 달 동안 계속하였다. 다만 위로되는 것은 자기들에 대한 교우들의 신뢰심과 정성이었다. 교우들은 신부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알아 비록 자기들이 어떠한 곤란을 당할지라도 신부의 사정이라면 적극적으로 돌보아 주었고 신부의 말이라면 그대로 순명하였다. 따라서 교우들의 신덕은 나날이 깊어지고 그들의 덕행도 향상되어 나가는 것이 현저히 나타난다. 비록 극도의 생활난에 시달리고 있으나 그들은 천사처럼 평화스럽게 지내고 있다. 이 신부가 중국으로 건너갈 기회를 탐지하러 서울로 떠난 다음 권 신부 혼자서 서운한 마음으로 외롭게 지내던 중 하루는 문 회장이 나타났다. 문 회장은 권 신부를 오랜 기간 잘 모시고 있다가 소문이 날까 두려워 그 동안 충청도 공주 관불산에 권 신부를 모실 자리를 잡아 놓고 식구들을 이사시킨 후 권 신부를 모셔 가기 위하여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권 신부는 도중에 강 신부를 방문하고 문 회장을 따라 나서기로 결정지었다. 문 회장은 이 신부의 성물들을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가기로 하고, 권 신부는 교우 몇을 데리고 강 신부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 이튿날 일행이 길을 떠날 때 문 회장의 주선으로 관청에 높은 행차 모양으로 차렸다. 문 회장은 말을 타고 앞에 가고 그 다음에는 상제복을 차린 신부가 타고있는 사륜교, 그 뒤로 짐바리, 그리고 좌우에 하인들이 호위하여 그 기세는 실로 늠름하였다. 누가 보든지 나라의 죄인으로 숨어 다니는 신세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큰길에는 양인을 잡으려고 오고가는 행인들을 수색하는 포졸들이 이 행차 앞에는 쩔쩔매며 길을 내주는 꼴이 우스웠다. 행차는 백암리(伯岩里)장터에서 점심을 먹었다. 장 한복판에 있는 객주 집에 들어가 신부는 내실에 있게 하고 회장은 마루에 좌정하였다. 교우 하인들은 뜰 아래 좌우로 벌려 서서 잡인을 경계하고 있으니 실로 늠름한 기세였다. 동네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큰 구경거리가 생긴 듯 밀려드는 것을 하인들이 소리를 질러 몰아낸다. 양인을 잡으러 다닌다는 포졸 한패가 들어와 무슨 행차냐고 묻는 것을 하인들이 경상 감사의 행차라고 대답하였다. 그중 한 놈이 경상 감사의 행차가 어찌 이리로 지날까하는 의심이 났던지 머리를 갸우뚱하고 생각하더니 수상스럽다는 눈동자를 굴려 상좌를 유심히 살피고 있다. 이런 눈치를 모를 회장이 아니었다. 이런 때 시간의 여유를 주는 것은 극히 불리한 것이다. “네 저놈을 잡아 꿇려라!” 회장은 갑자기 벼락같은 호령을 내린다. 하인은 우르르 몰려들어 그놈의 꼭두를 쳐서 꿇려 놓았다. “네 이놈, 어떤 놈이냐?” 그놈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틈을 타서 회장의 호령은 계속된다. “이놈,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도적놈이다! 그놈을 단단히 묶어라!” “소, 소인은 양인을 잡으러 다니는 포졸이올시다.” “포졸……, 이놈아, 그렇다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양인이나 잡을 것이지, 왜 이런 장거리에서 놀고 지낸단 말이냐? 양인 잡으러 다니는 포졸들의 행패가 심하여 살 수 없다는 민원이 궐내까지 들어간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놈들, 이 장거리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내 알아보겠다!”이 말에 포졸의 기세는 완전히 꺾였다. 뒤에 섰던 다른 놈들은 슬슬 빠져 달아났다. “여기 와서 있는 포졸이 모두 몇 명이며 두목은 누구이냐?” “예, 죄송합니다. 소인이 두목이옵니다.” “원, 저런 죽일 놈 보았나! 네가 두목이면 수하를 지휘하여 양인 잡기에 몰두해야 할 일이지, 그래 이런 주막거리에서 허송 세월이 웬말이냐?” “그저 살려 주십시오. 이번만 용서하시면 어떻게 하든지 양인을 잡아 바치겠습니다!” 포졸 두목은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한다. “이놈들, 너희 소행을 생각하면 당장 나라에 장계를 올려 처단 받게 하겠지만 이번엔 특별히 용서하는 것이니 네 수하들을 데리고 어서 이곳을 떠나 촌간에 돌아다니며 양인을 잡되, 만일 백성에게 작폐하는 일이 있으면 그때는 네 목이 떨어질 줄 알아라!” 두목은 백배 치하하고 물러 나갔다. 그리고 부하를 데리고 즉시 백암리 장터를 떠났다. 혹시 백성 중에서 무슨 상소가 올라가 조사가 시작된다면 자기들이 저지른 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시장거리 백성 중에는 의관을 갖추고 대감행차를 찾아와 인사를 드리며 포졸을 쫓아 보내준 은공을 사례한다. 신부 일행은 갈 길이 바쁘다고 서둘러 그 곳을 떠났다. 금방 지나간 행차가 포졸을 몰아냈다는 소문은 즉각 양지 장거리에 확 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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