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신부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초신학에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의 훈련이라면, 이 신앙은 자주
의심과 그리고 미약한 실천적 행위와 투쟁하는 가운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신학은 (포괄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완전한 신앙이 아니다."라고 글을 읽으면서 왜 나는
자주 의심을 하는가? 늘 그것이 큰 불충스럽고 죄스러운 자신의 모습에 너무 비참함
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경우에 참으로 저자신 놀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하고서도 스스로
놀랠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식별해야 할지 한말씀 하여 주실 수 있으신지요?
1)2년여전(2002년 여름) 감실앞에서 느닷없이 빛안에서 저너머에 영원성이 실재하는 세상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느낌이라고 해야할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광명(光明)을 보았다고
하는 듯한 자각, 스스로는 깨달음 이라고 표현을 빌릴 수 밖에 없습니다.
실재 앞에 즉 형체도 없고 무어라 말로 그 느낌 상황을 표현 할 수
없는 저 너머, 그 앞에서 기쁨의 눈물과 크게 다가오신 실재 앞에 죄스러움과 더욱
작아진 자신의 비천함에 눈물을 흘렸던 개인신앙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깊은 순간에 주님앞에 감히
"늘 깨어 기도하는 사도(평신도)가 되겠습니다" 하고 독백(하느님과의 약속) 이라고
해야 할지? 신앙고백 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하였습니다. - 참조 註.1
회상해 보면 마치 안하고는 도저히 못견딜 감사함이라고 해야할른지요? - 참조 註.2
"참조 註.1- 2004,8,23일 복음말씀
사실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한 맹세이고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한 맹세이며 또 하늘을 두고
한 맹세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두고 한 맹세이다."
(마태 23,20-22) 2004,8,23일 복음말씀에서 영성체후 살아있는 말씀으로
제가 무지하게 "...독백인지? 신앙고백?인지 ..."모르는 마음(신앙안의 표현)을
예시하여 주시는 듯이 성서의 말씀을 통하여 먼저 말을 건네 주시는 다정하신
선생님으로 오신 하루 였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회개의 기도를 올린
새날의 미사와 묵상 이었습니다.)
"참조 註.2 - 2004,8,27 복음환호송
◎ 알렐루야.
○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가복음 21,36)
◎ 알렐루야
2004,8,27일 새벽미사 - "...도저히 못견딜 감사함이라고 해야할른지요?"하는 마음이
복음환호송 이었음을 예시하여 주신는 듯 오늘 살아있는 성서 말씀을 통하여 다가 오신
새날의 미사와 묵상 이었습니다)
복음 말씀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마태 25,13)
그리고 진리에 대한 기쁜 마음과 작은 실천에 죄스런 마음으로 집으로 늘 걸어다니는
같은 그 길과 주변 자연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경이롭고 환희로운 아름다움이
평생 처음 이었습니다. 그 이후 한동안 계속...
참조:
"[...]우리가 믿는 복음 선포의 본질적인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존재 세계가 열렸다는 것, 곧 하늘나라입니다. 이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자녀들이자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들인 우리들 안에서 자라나고 익어 갑니다.[...]
[...] 세상은 탄생의 고통 중에 있습니다. 만물은 애초의 존재 상태에서 나와 생명을 향해
발전해 나아갑니다. 생명은 인간 안에서 정신으로 변형되는 가운데 완성됩니다. 정신은
하느님을 인식하고 사랑 안에서 그분께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그리고 그럴 때에만,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이런한 합일(合一)은 만물을 영원한 완성
속으로 가져갑니다. ...[...] 우주는 통일된 전체를 이룹니다. 창조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요한의 묵시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그러므로 나는 이제
너를 위해서 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수 없다"[3,8]....
- 죽은 후에는 /김진태 신부譯 에서
‘[...] 십우도’ 중에 아홉번째는 반본환원(返本還源)이다. 본래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소도 잊고 나도 잊고 깨침이라는 것도 잊은 상태에서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경지를 표현한다.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의 모습을 꿰뚫어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본래로 돌아올 걸 공연히 애썼구나. 차라리 눈멀고 귀먹었던들,
집 앞에 물건을 왜 못 봤던고?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절로 피어 있네.”[...]
- 8월 야곱의 우물에서
" [...]밥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으려는 순간, 그 날 따라 습관적으로 바치던 식사 전
기도가 되뇌어졌습니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 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그러자 문득 목이 메어왔습니다. 한순간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갑작스레 감사의 정이
복받쳤던 것이지요. 밥 한 톨에 깃들어 있는 햇빛과 빗줄기와 누군가의 수고와 땀이
고스란히 보였습니다. 부드럽게 갈아엎은 흙 위에 씨가 뿌려지고 자라고 영글어서,
지금 나를 배불리기 위해 식탁에 오른 따뜻한 밥 한 그릇. 그 자체로 사랑이고 신비
였습니다.
몇십 년을 습관적으로 먹어오던 밥이 그 날 따라 왜 그렇게 처음 맞닥뜨리는 새로운
경이처럼 느껴졌는지, 아마 은총이라는 말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듯싶습니다. 그 날
이후로 이 세상을 바라보던 내 눈에서 습관의 굳은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진 것
같았습니다. 앞산의 푸른 나무와 나를 둘러싼 모든 사물과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서도 밥 한 그릇에 담겨 있는 것과 같은 우주적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 8월 8일 주보 이삭의 글에서
그 일을 체험한 후 지금까지 매일 새벽미사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안에
영적위로와 기쁨, 회개,통회의 은총을 가끔 받아가면서, 간혹 성체성사안의 신비스런
은총도 함께, 때로는 깊은 침묵안에 기도하는 그 침묵이 충만케 하였습니다.
참조:
[...] 그곳에는 어떤 견해나 관점도 없다....그리고 동시에, 이 무한의
모든 부분을 채우는 침묵이 존재한다. 그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분명한 감각의 대상이 되는, 소리보다 더 분명한 침묵이다. [...] -시몬느 베이유
2004년 8월 중순
s.사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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