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대로 맡기세요 ◇
*글. 김 루치아 수녀 *
교리신학원에 다니던 때입니다. 모든 자연이 새 옷을 갈아입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주님께 찬미하며 알렐루야를 외치고 있는 듯한
어느 날, 제 마음만은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수업 시작 전, 피곤을 가셔보려고 자판기의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마침 제 눈에 연둣빛 새순이 너무도 깨끗하고 아기 볼처럼 느껴지는
나뭇잎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무에게 “나무야,
네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어쩜 너는 존재 자체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니. 네가 정말 부럽다." 그런데 “부러워하지 마세요. 저도 조금 있으면 변할 거예요." 나무의 대답에 깜짝 놀라 "아! 그렇구나! "하였더니, "그럼요.
제 모습이 지금은 깨끗하게 빛나고 있지만 조금 지나면 색깔도
변하고 때도 묻고 벌레한테 먹혀서 상처도 생기고, 그러면서
살아 있는 거예요. 지금의 이 모습대로라면 성숙할 수 없답니다.
루시아 수녀님, 순리대로 맡기세요.
때가 되면 꽃이 피어야 할 때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져야 할 때
열매가 맺어집니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나무가 점잖게 저를 꾸짖는 것 같았습니다.
그 날부터 저는 나무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매일 학교 가는 길에
나무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나무는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꽃을 피워 뽐내다가도 자신이 사라질 줄 알 때
꽃이 진자리에서 열매가 맺힌다는 이야기. 화려함을 잔뜩 드러내고
있을 때 뿌리가 애쓰고 있는 이야기.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애써
키워 온 나뭇잎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 등. 나무가 말했습니다.
“이렇게 죽고 부활하면서 나이테에 하나씩 성숙의 표시가 드러난다."
라고.
작년 가을,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떨어지면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얘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떨어지자. 사실 우리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거야. 원래 흙 속에 있던 존재인데, 어느 날 생명의 빛을 받아 많은 영광을 누렸잖니. 떨어져서 누군가의 발에 밟혀 거름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영광이잖니!
나뭇잎의 용기에 감동이 되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의 모습도 흙에 불과한 존재인데 주님의 생명의 빛을 받아
사람이 되어, 수도자가 되어 많은 영광을 누렸습니다.
“주님! 저도 저 나뭇잎들처럼 떨어지는 연습, 내려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지금도 나무는 많은 가르침을 전해 주는 저의 좋은 친구입니다.
- 김경희 루치아 수녀·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 구산성지 매일 오후 2시 강의(月 휴강) ♪ http://www.gusansungji.or.kr (2004.4.25(다해) 주보.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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