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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삶속에 떠 있는 무지개 발견할 때 인생의 참 의미 깨달을 수 있어
작성자송규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5-08-28 조회수1,054 추천수0 반대(0) 신고

다니엘(11) / 내용(7) - 2005년 8월 28일 가톨릭 신문에서 (마치 격려하듯이...)

 

삶속에 떠 있는 무지개 발견할 때 인생의 참 의미 깨달을 수 있어


책이 빡빡하게 들어선 작은 내 서재에는 아직도 몇 권의 동화책이 꽂혀 있다. 전문서적들과 함께 꽂혀 있는 동화책이라니, 역시 정서가 언밸런스야, 하던 누군가의 지적이 기억난다. 아마도 동화가 주는 단순한 행복과 비현실적 순수가, 내게는 아직도 위안이 될 때가 있어서 인가 보다.


그중에도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무지개를 소재로 한 동화이다. 그런 동화를 읽는 데는 단 한 번도, 이걸 읽어야 하나? 라는 갈등을 겪어본 적이 없고, 처음 나온 졸서의 표지에도 무지개를 그려 달라고 했을 정도이니, 무지개를 좋아하는 수위가 보통을 넘었음은 충분히 가늠된다.


그래서일까. 사실은, 비밀인데(?), 박사학위 최종 시험을 보는 날 아침에도 활짝 웃고 있는 무지개를 보았다. 꿈이 아니라 실제로…. 아침기도를 마치고 옥상에 올라갔을 때였는데, 어떻게 무지개가 뜬 그 짧은 시간에 거기 올라가게 되었는지, 혼자서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며 간직하고 있는 흐뭇한 우연 중의 하나이다. 물론 여름이었고, 지중해성 기후인 로마의 기후를 참작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했다.


지난번에도 친구 수녀님과 서점에 갔다가 은근히 동화책 코너에서 어슬렁거리는 나를 보고, 웬 동화책? 이냐며 의아해 하길래, 으응- 조카 주려구, 했다. 하지만 우리 집 가족사를 훤히 뚫고 있는 그녀인지라, 조카 아직 돌도 안됐잖아, 하며 즉시 태클을 걸어 왔고 나는, 으응-, 고모가 누구니, 날 닮아서(?) 머리가 좋아. 한글 금방 깨칠거야…. 하고 또 얼버무렸다. 그냥 내가 보려고, 하면 쉬웠을 걸, 둘러치는 나를 안됐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에게 왠지 창피하고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권력과 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폭풍우 속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그 폭풍우 이면에 있는 무지개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게 우리 삶일 지도 모른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권력 잡은 이들의 폭력을 견뎌야만 하고, 다스리기 위해 다스림 받는 위치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지개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동의 시간들이 삶이 아니라, 무지개와 함께 사는 아름다운 시간이 삶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은 시작된다.

 

 각자의 삶 안에 떠있는 무지개를 보지 못하고 평생을 사는 것은 너무 불쌍하고 잔인한 일이다. 그러니 여유를 내어 하늘을 볼 일이다. 하늘나라는 지금, 여기에, 우리 안에 이미 와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무지개를 보지 못하듯,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

 

느부갓네살. 신생 바빌론을 신흥 대제국으로 탄생시켰던 장본인이었던 그 역시 하느님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혁혁한 성공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왔던 인물이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게 될 다니 4장은 하느님 없이 성공하고 출세하며 꽤 인생을 잘 꾸려왔다고 생각하던 그가 인생 유전 끝에 어떻게 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지, 그 파란만장한 과정을 소개해준다.

무서운 고통의 끝에서 만나게 된 하느님은, 그가 마침내 발견한 인생의 무지개가 아니었을까.


전반적 특징


다니 3, 31~4, 34은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백성에게 보내는 일종의 공식서한(Epistle)으로 되어 있다. 그 시작이 왕의 서한에 의례적으로 등장하는 고정적인 틀, 즉 발신자의 이름을 밝히고 이어서 수신자가 등장하는 고유 어법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은, 복잡한 텍스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인데, 마소라 텍스트의 절수 표기와 그리스 텍스트의 표기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측 번역들은 모두 히브리 본문인 마소라 텍스트(MT)의 절수 표기를 따르고 있고, 개신교측 번역은 그리스어 본문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3, 31~4, 34로 표기하는 내용을 개신교에서는 4, 1~37로 표기한다.

마지막 특징은 「1인칭 시점」을 통한 고백문(confession) 성격이라 하겠다. 이러한 1인칭 시점은 다니엘서의 전반부(1~6장)에서 유독 이 부분에만 발견되는 것이기에 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16절과 25~30절에는 3인칭 관점이 삽입되어 있다).


구성


이상의 특성을 배경으로 서술되어 있는 3, 31~4, 34은 사실상 매우 체계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그런데 이 중 가장 시선을 끄는 부분은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함께 조응하도록 구성한 「인클루시오」(inclusio) 기법이다.

처음 등장하는 세 절(3, 31~33)과 마지막 네 절(4, 31~34)이 모두 하느님의 왕권을 칭송하고 찬양 드리는 「송영」(doxology)을 포함하고 있으며, 느부갓네살의 1인칭 고백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 대한 느부갓네살의 찬양으로 시작하고 끝나게 되어있으며, 그 사이에 자신의 회개 여정을 삽입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광주가톨릭대 교수〉

 

 

※『야곱의 우물』冊에 나오는 《매일성서묵상》내용입니다.※

 
                     - 임숙희 님 (그레고리안대학 신학박사과정 ) - 

오늘은 대제관과 백성의 원로들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예수의 '권위'에 대해
질문한다. 마태오복음뿐 아니라 공관복음서 곳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절대
적인 권위가 모두 예수께 주어졌으며, 예수께서는 그 권위로 말하고 가르쳤
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몇 년을 외국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보다 는 먼저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했다.
힘 자라는 데까지 사람들을 도와주려 하고, 충실한 가톨릭 신자인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와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마치 '영원한 타인'처럼 견고한 성벽이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차츰 이 불편한 관계의 뿌리가 '나는 이미 알고 있지'를 덧붙이는 그녀의 습관적인 말투에 대해 내가 느끼는 거부감이 차츰 내면을 건드리지 않은 피상적인 대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경험과 지식으로 인간사와 하느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길 때 그것을 넘어서는 하느님 신비의 영역은 모습을 감춘다. 나이 칠십이 되어 도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뛰는 인간의 신비는 빛이 바래고, 인간 사이의
만남은 내 지식과 정보를 확인하기 위한 기회로 그치고 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일했던 대제관과 원로들이 가진 지식은 그들이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을 막고 예수께서 지닌 권위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보게 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사람들은 삶을 바꾸는 힘이 있는 예수님의 권위에 순종 하였다. 진정한 권위는 '거역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인간 내면의 성소에서 뻗어나와 몸을 비추는 햇살과 같다. (칼릴 지브란) 그런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옆에 있기만 해도, 스쳐지나 가기만 해도 아름다운 권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이런 아름다운 권위를 지닌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향한 갈망에 불을 지피고, 우리도 모르게 인생이 조각되는 소중한 계기를 마련한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종류의 권위를 지녔을 것이다.그분의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사랑, 슬픔과 기쁨,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그분의 몸을 찬란하게 비추어 사람들이 더이상 거역할 수 없는 그런 권위로 충만한 분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묵상

14110

 

12월 12일-아름다운 권위/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넷째 날)  참조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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