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故) 지학순(池學淳) 주교(主敎)를 만난 사연-나의 고백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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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용섭 | 작성일2007-07-02 | 조회수1,45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나의 고백 (2)
중생(重生)을 체험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여러해 동안 서울 혜화동에 위치했던 가톨릭학생회관 지하성당에서의 성령세미나 모임에 나갔다. 그때를 전후하여 나는 방언의 은사(심령기도. 이상한 언어의 은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를 경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천주교 영성신학의 대가(大家)라고 일컬어졌던 일본 상지대학의 네메셰기 신부(예수회)도 방언의 은사가 단지 "심리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신학전망 1974년 가을호). 그래서 성령세미나 모임에서 신자들이 방언기도를 하는 것을 보게 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왜 저런 어리석고 유치하고 쓸데없는 짓거리를 맨날 하고 있을까" 하고 푸념을 하곤 했었다. 그렇지만서도 내가 그 모임에 계속 나갔던 이유는 거기에 나오는 천주교 신자들이 일반 천주교 신자들보다 사랑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978년 12월 어느날 나는 옛친구가 사는 경북 영천을 다녀왔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불국사에 있다는 사십대로 보이는 한 스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십대초부터 겪어온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십대말(?)에 출가(出家)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생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도(修道)했으나 실패했다고 분노했다. 덧붙여 불교는 위선과 사기의 종교라고 개탄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원리를 간단히 설명했더니 그는 대번에 이것이야말로 진리라고 인정했다. 대화가 더 깊어져서 그에게 그가 절에서 나올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의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절에서 나와도 갈 곳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한번 알아보겠다고 말하고서는 그의 연락처를 받아두었다. 서울에 와서 본당 보좌신부에게 이 문제를 얘기했더니 그냥 무시해버렸다. 그렇게 되어서 그 스님에게 연락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가끔 생사를 알 수 없는 그에게 미안함을 느낄 때가 있다. 당시 이 문제를 개신교의 목사들에게 부탁했었더라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까 ? 아마도 잘 해결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한국 개신교는 적지 않은 스님들을 받아들여 목사들로 키웠는데 이러한 것이 한국 천주교보다 뛰어난 점이라고 생각된다. 1979년 1월에 나는 심한 강박신경증에 걸려 1990년 12월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치유될 때까지 만 12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했다. 1979년 봄 나의 이모의 소개로 당시 한국 천주교 원주교구 교구장 고(故) 지학순 주교를 원주교구청(주교관)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거기에서 지 주교는 나에게 영어 실력 측정 등 몇 가지를 한 후 나를 호주(濠洲)로 보내 신부로 만들겠다고 하면서 짐을 꾸려 수일내에 여기로 다시 내려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서울로 온 후 즉시 짐을 꾸려 원주교구청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러나 나는 지 주교와 나의 노모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도착했던 날 저녁부터 폭주(暴酒)를 하기 시작하여 결국 지 주교에게 쫓겨났던 날 전날 저녁까지 거의 폭주를 했다. 당시 원주교구청에는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에 의하여 구속 수감되었던 저항시인 김지하님의 부모님과 부인(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님의 딸)이 살고 있었는데 매달 그들에게 생활비(김지하 시인의 월급이라고 기억함)까지 지원되었다. 거기에 있을 때 나는 김지하 시인의 부친과 몇번 대화를 했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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