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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나의 고백 (9)
작성자이용섭 쪽지 캡슐 작성일2008-05-02 조회수1,594 추천수0 반대(0) 신고
나의 고백 (9)
너무나도 괴롭고 슬프며 힘든 인생살이
 
입력 : 2007년 08월 23일 (목) 12:40:00 [조회수 : 244] 이용섭lys979111@naver.com
 
나의 투병 12년 동안의 사연들 중 즐거웠던 것들은 별로 없고 괴롭고 기구한 것들만 가득하다. 나의 기구한 인생은 태어날 때(1954년 7월 1일생)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생후 7개월만에 애비인 대한민국 공군 장교(당시 대위였으나 중령 시절 군수품 비리 문제로 감방 가서 이등병 전역)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는 1971년도에 그의 가족 모두를 데리고 미국 이민을 갔다. 미국에서 그의 첫 아들은 안과의사(1956년생)가 되었고 그의 둘째 아들(1958년생)은 하버드 법대와 동 대학원을 나온 미국 변호사인데 국내 티뷔에서도 보았다. 내 애비는 한국 전쟁 발발 전 서울공대 금속공학과에 다니다가 전쟁이 터져 바로 공군 장교로 입대하였다. 이들의 애미는 연세대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했다. 그리고 이 애비의 애비의 묘가 서울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있으니 천주교 집안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의 노모에게 양자로 오게 된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1987년 4월 26일이다. 이 날은 내가 평생 두번째로 깊게 교제(그리고는 현재까지 여자가 단 한번도 없었음)한 여인(조ㅅㄹ. 1956년생. 개신교인)과 헤어진 날이다. 그녀는 미스 경기 출신이지만 처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의 오빠 하나가 약 10년 전 러시아에서 추방된 안기부 요원이다. 하여간 그 날 과거 나를 지학순 주교에게 소개했던 이모와 다투다가 그녀가 나에게 "너가 우리랑 피 한 방울이라도 섞였는지 아느냐"고 고함을 질러댔다. 이후의 사연들은 쓰고 싶을 때마다 조금씩 올려놓겠다.

나의 투병 생활의 반은 기도였지만, 나머지 반은 술로 살았다. 한달을 기도하고서 응답이 없으면 약 한 달을 하느님께 원망하면서 비관 속에서 술로 살았다. 그 12년을 거의 이런 연속으로 살았다. 과거 나는 외대 출신들을 조금 알았다. 그들 중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장인태라는 자가 나에게 사창가에 가볼 것도 진지하게 권유했다. 당시 내가 여자를 몰랐기에 그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끌고 나와 내 병의 원인이 "성에 대한 억압" 때문이라고 했다.

술과 담배를 끊게 되면 혹시나 내 병이 나을까 해서 술을 1981년 말부터 1982년 12월 31일까지 만 1년 1개월을 끊어보았다. 담배는 경기도 탄현 근방에 있는 "임마누엘" 기도원에서 1982년 5월 31일부터 약 보름을 끊고 나와 그 해 12월 31일 밤에 술과 담배를 다시 입에 댓다. 왜냐하면 이렇게까지 해도 병이 낫지를 않아 엄청난 비관 속에서 하느님을 원망하며 밤새도록 마셔대고 피워댔다.

그 다음 해인 1983년 봄 한 집에 같이 세 들어 살고 있었던 어떤 키가 매우 작고 못생긴 노처녀(김ㅂㅇ. 1953년생. 천주교인. 소피아)가 계속 유혹해 왔다. 예컨대, 밤중에 같이 커피 마시자고 커피 둘을 타가지고 내 방에도 자주 들어왔다. 과일 등을 깍아가지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가 그녀에게 실수를 했다. 나의 첫경험이다. 그리고 한 집에 함께 세 들어 사니 동거생활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와 그녀와 헤어질 때까지 그녀로부터 애정은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책임을 지려고 다이아 반지도 하나 구입하여 결혼 날짜까지 잡았다. 결혼은 서울 우이동 천주교 피정센터 "명상의 집" 성당에서 천주교 식으로 하기로 했다. 혼인미사는 미국인 사제가 하기로 했다.

그런데 결혼 일을 며칠 앞두고 그녀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래서 결혼식을 취소했다. 한참 후 그녀를 찾아내어 그녀를 죽도록 팼다. 나는 십대 시절 킥복싱을 한 몸이다. 지금은 50대 중반에다 하도 술에 쩔어 힘이 거의 없지만 그때는 30대 초반이라 힘이 어느 정도 있었다. 20대 초에 나는 2대1로도 한판 붙어보았고, 3대1로도 한판 붙어보았다. 둘 다 내가 진것이 아니니 이긴 것에 가까울 것이다. 죽도록 패면서 결혼 날짜 다 잡아 놓고 나와 내 노모에게 개망신을 시킨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결혼 날짜를 잡은 후 자신이 혼자 병원에 갔었다고 했다. 거기서 자신에게 "폐결핵" 진단이 나와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그렇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은 나와 내 노모는 너무나 어이없어 했다. 그리고 그녀가 우리에게 용서를 구했고 그래서 그냥 이전 처럼 다시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나의 정신질환은 전혀 호전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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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54년 부산 생, 프리랜서, 전 월간 <시사정경> 객원기자,
전 월간<월드 코리아> 객원기자(차장대우), 전 월간<선택> 객원기자(차장),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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