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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나의 고백 (14)-기가 막히는 사진 하나 첨부
작성자이용섭 쪽지 캡슐 작성일2008-05-05 조회수2,294 추천수1 반대(0) 신고
나의 고백 (14)
땅굴발굴 절개작업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들
 
입력 : 2007년 11월 06일 (화) 11:50:55 [조회수 : 412] 이용섭lys979111@naver.com
 

1998년 2월 나와 중견언론인 이태호 형과 고 정지용 선생님과 이창근 후배 등과 함께 dj에게 보낼 "땅굴 탄원서"를 만들어서 이것을 이태호 형이 전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박홍 신부를 만났다. 당시 박홍 신부가 그 탄원서를 직접 dj에게 전달했다고 우리들에게 말했다. 후에 우리는 dj에게 보낼 "두번째 땅굴 탄원서"를 만들어 이태호 형이 그것도 또한 박홍 신부에게 갖다드렸다. 이 탄원서도 역시 박홍 신부가 직접 dj에게 전달했다.

우리는 98년 9월부터 연천 구미리에서 땅굴발굴 절개작업을 개시하여 2000년 봄까지 하였다. 그러나 dj는 우리들에게 십원짜리 하나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j는 남북정상회담의 조건으로 5억 5천만 달라를 김정일에게 지불했고 이외에도 그가 더 퍼준 것은 어마어마한 천문학적 수치이다. 이건 노통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김정일이가 dj로부터 돈을 받자마자 한 일은 러시아에서 최신식 전투기를 10여대 구입한 것이다. dj와 노통은 매국노이자 민족반역자이다.

   
 
     
 
민간 땅굴탐사자 고 정지용(전 보안사 준위, 오른쪽 사진) 선생님은 2002년 12월 초 화성 땅굴 현장 부근에서 북한 공작원이 쏜 레이저 총에 의해 뇌졸증으로 죽었다. 레이저 총을 쏘게 되면 사람 몸에 500원 짜리 동전만한 크기의 멍같은 것이 박히고 이것이 즉시 혈전으로 변하여 대뇌 등에 들어가게 되면 뇌졸증으로 죽게 된다. 민간 땅굴탐사자 최민용 형은 2003년 3월경 고 정 선생님과 똑 같은 꼴을 당했으나 혈전이 자기의 코 위에서 터져 죽지 않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불구가 되었다.

2000년 8월경 부터 박찬성이는 나를 국방부의 앞잡이로 매도했다. 박은 나에게 국방부에 가서 술 얻어먹고 거금도 받아먹었다고 전화중에 얘기하였는데 그것은 녹음이 되어 있다. 나는 2000년 7월경 국방부 탐지과장 고 김병조 대령(천주교인. 베드로)을 만나 합의를 본 일이 있다. 그분은 나에게 박찬성이가 8억을 공탁하면 SBS 보도장소 두 곳을 절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내가 박찬성이의 핸드폰으로 그 합의내용을 알려주니 오히려 나에게 화를 엄청 내었다.

고 김 대령은 나에게 말하기를 절개를 하여 땅굴이 틀림없으면 공탁금의 천배든지 만배든지 보상을 할 것이고 땅굴이 아니면 그 공탁금이 국고로 귀속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 고 김 대령은 내 앞에서 땅굴 문제로 인해 하느님께 맹세했고 그때 그 증인은 국방부에 약 10명이 있다. 과거 고 김 대령과 나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가 있고 종종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고 정지용 선생님은 어떤 면에서 우리 민족과 나라에 너무나도 큰 과오를 저질렀다. 그것은 1995년 초 YS의 특명으로 그분에게 국방부가 모르게끔 안기부와 함께 땅굴 발굴 작업을 시켰으나 그의 고집과 어리석음과 과욕과 무지로 인해 실패한 것이다.

그때 성공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ㅃㄱㅇ ㅅㄲ들은 흔적도 없이 벌써 사라졌을터인데 말이다. 여기에 대한 중요한 증인들은 최민용 형과 이창근 후배 등이다. 그러나 그분은 실패한 후에 자기 잘못들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들을 남들에게 뒤집어씌웠다. 예컨데, 월간조선 1996년 9월(10월?)호 땅굴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경찰관 출신 이x과 함께(?) 조선일보 회장을 고소한 사건이다. 이 일 때문에 나도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무안을 당했다.

내가 땅굴 문제에 뛰어든 것이 올해로 만 11년이 넘었다. 그 결과 대통령이 국방부를 의심하여 비밀리에 민간인에게 땅굴 탐사를 시킨다는 것이 기적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 내가 YS를 다소 싫어했지만 요사이는 YS를 하느님께서 내신 위대한 대통령이었다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이런 큰 행운을 자기 잘못들로 인해 놓친 고 정 선생님은 백번 비판받아도 유구무언해야 한다. 하지만 그분이 살아 계셨다면 아마도 자기 잘못들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했을 것이다. 고 정 선생님에게 1992년도와 1993년도에는 숨겨논 여자(애인)도 있었다고 과거 나에게 이창근 후배가 증언한 바도 있다. 이분을 성웅 이순신 장군님에 비유한 윤여길 박사님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에 이러한 큰 행운이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만 더 오기를 성 삼위일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그리하여 SBS의 고철종 기자의 명예도 회복되고 고 정 선생님의 억울한 죽음도 만천하에 알린 후 이분을 우국지사로 올리려고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김진철 목사와 이창근 후배가 국가적 영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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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54년 부산 생, 프리랜서, 전 월간 <시사정경> 객원기자,
전 월간<월드 코리아> 객원기자(차장대우), 전 월간<선택> 객원기자(차장),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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