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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순교자성월, 마지막 날에 받은 은혜
작성자이봉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06 조회수1,05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07년 순교자 성월 마지막 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어디든 떠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순교자 성월을 맞으면서 아직 가보지 못한 국내 성지를 혼자 순례하겠다는 결심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계획이 무산된 채 영성생활이 힘을 잃고 한 달을 휘청거리고 살았는데, 그 순간 문득 떠오른 곳이 공주중동 성당이었습니다.

 아침기도는 버스에서 바치기로 하고 미사도구를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교중미사시간에 대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속터미널에 도착해 차표를 끊고 나니 시간이 남았습니다. 자판기의 커피가 화이트 초콜릿 모카보다 더 달콤했습니다.

 충남공주는 내가 어렸을 적에 자란 고향입니다. 더구나 성당은 교회라기보다는 어린 시절 아이들과 뛰놀던 놀이터였습니다. 그리고 그 놀이터에서 제일 친한 친구는 눈이 짙고 콧날이 오뚝하신 프랑스 신부님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겐 엄한 신부님이었는지 몰라도 내겐 인자하신 아버지 같은 분이었습니다. 책가방만 내려놓으면 높은 계단을 쏜살같이 올라가 사제관으로 들어갔습니다. 부모님보다 신부님께 학교에 다녀왔다고 먼저 인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후에 해외 원조가 물밀 듯 밀려오던 어린 시절, 구호물자가 성당에 도착하면 신부님은 예쁜 구두와 옷을 챙겨놓으셨다가 나에게 입히시곤 하셨습니다. 감기만 결려도 사제관으로 달려가 엄살을 부리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시던 그리운 신부님, 이미 세상을 떠나셨겠지만 나는 아직도 신부님을 잊지 못하고, 그분의 체취를 맡으러 공주를 향해 발길을 내디뎠던 것입니다.

 늘 그랬습니다. 내 의식 속에는 한국에 파견되어 일생을 마친 외국 신부님들은 순교를 하셨든, 수명을 다해 돌아가셨든 모두 성인으로 비춰졌습니다. 그분이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 해주신 그 사랑이, 바로 순교의 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늘도  그 얼이  저의 신앙을 굳건이 지켜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차게 퍼붓는 비속을 헤치며 어릴 적에 헉헉대며 오르내리던 성당의 계단을 밟으니 가곡 “옛 동산에가 올라”가 생각이 났습니다. “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려.” 그러나 아직 이 성당만큼은 대개가 옛 그대로이니 옛 시인의 말이 허사는 아니었습니다.

 미사가 시작 되었습니다. 입당하시는 신부님을 뵈니 여덟 살 소녀로 돌아가는 듯 했습니다. 눈을 감으니 곧 제대에 눈이 짙고 콧날이 오뚝하신 그 시절 그 신부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오십여 년 만에 마음의 눈으로 선명하게 보이시는 신부님이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부님 뒤에 파리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신부님께 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난, 스물한 살의 언니가 함께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착하고 예뻐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했던 맏언니였습니다.

 미사시간 내내 창밖에 내리는 비처럼 가슴이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잃고 긴 세월동안 겪었던 고통스런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미사가 끝나고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그 슬픔은 어디론지 다 사라져 버리고, 형용키 어려운 기쁨만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 청하여라 ,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 마태 7, 7) 하신 말씀이 빗줄기를 타고 응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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