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거지와 부자 (최인호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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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황묵 | 작성일1998-09-29 | 조회수8,040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거지와 부자'
최인호 베드로/작가
1987년 11월 2일 오후 4시경. 저는 일본의 오사카에 있는 작은 호텔 커피숍에 앉아있었는데 누군가 전화가 왔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아내로부터 걸려온 국제전화였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아내는 이렇게 말한 다음 방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방으로 돌아온 후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무릎을 끓고 삼종기도를 올린 후 갖고 다니던 신약성서를 펼쳤습니다.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잦집 대문간에 앉아서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듯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문간방에 앉은뱅이로 앉아서 아들딸의 무관심 속에서 거지처럼 살아가셨습니다. 거지 라자로가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는 복음을 읽자 저는 어머니의 죽음이 슬픈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온갖 불행이란 불행은 다 겪었던 라자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듯 살아있을 때에는 개들까지 몰려와 종기를 핥을 만큼 고통받던 어머니가 하느님의 품에 안기어서 편히 쉰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살아있을 때는 종기투성이의 거지였으나 죽은 후에는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안식을 취하는 라자로와 살아있을 때는 즐겁고 호화스런 부자였으나 죽은 후에는 연옥의 불꽃 속에서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혀를 축여달라고 애원하는부자의 모습을 통해서 죽음이 삶의 종말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시작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필가의 수호성인이며 저명한 교회학자였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슬프도다. 죽은 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불충분하다. 장례식 종소리가 멎음과 동시에 그들의 생각은 우리 심중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성서에 의하면 참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프랑스의 대표적 낭만파 시인인 라마르틴(1790-1869)은 16년 연상인 애인이 죽자 사랑을 잃은 절망 속에서 <명상시집>이란 서정 시집을 출간했습니다. 이 시집에서 라마르틴은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이 세월이 갈수록 잊혀지자 '망각은 죽은 이의 두 번째 수의(壽衣)다'라며 탄식했습니다.
살레시오의 말처럼 죽은 사람이 죽음과 동시에 기억에서 살아지고 라마르틴의 시처럼 죽은 사람이 우리에게 망각된다고 할지라도 죽은 사람은 살아있는 우리를 잊지 않습니다. 연옥의 불꽃 속에서 고통받는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제발 부탁입니다. 다섯 형제에게 라자로를 보내어 이 고통스로운 곳으로 오지 않도록 경고해주십시오" 한 것으로 죽은 영혼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죽은 부자를 태우는 불꽃을 끄고, 그 혀에 물을 축이고, 건너갈 수 없는 큰 구렁텅이를 건너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은 살아있는 우리들 다섯 형제의 몫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이들에게서 연옥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이 받는 고통을 대신 받고 참고 견디는 일인 것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11월 2일은 '위령의 날', 전세계의 교회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날입니다. 그 기념할만한 날에 저를 낳으신 어머니의 영혼을 거둬주신 우리 주 하느님, 온갖 영예와 영광을 세세히 받으시나이다.
아멘 +
--- 서울주보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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