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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PBC]6월10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독서 복음묵상
작성자조한구 쪽지 캡슐 작성일1999-06-08 조회수2,581 추천수2 반대(0) 신고
기쁜 소식. 밝은 세상

[PBC기쁜소식 밝은세상]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독서묵상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빛이나 불꽃 혹은 천둥과 같은 소리로 묘사되었지요. 이스라엘 최고의 영웅 모세만이 하느님을 빛 속에서 직접 대면할 수 있었을 뿐이지,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을 대면하려고 하거나 계약의 계를 만지게 되면, 즉사하고 말았다고 구약은 기록하고 있지요. 모세만이 하느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었고, 모세만이 백성들과 하느님을 중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고 시나이산에서 내려 올 때, 모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지요. 하느님의 빛이 모세 얼굴을 통해서 반사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그 빛 때문에 사람들은 눈이 부셔서 모세의 얼굴을 바라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평소에는 너울을 가리고 있다가, 하느님을 만날 때에 너울을 벗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사도 바오로는 모세의 얼굴을 가리던 너울을 율법에다 비유하고 있는데요, 유다인들에게는 율법이 너울처럼 가리고 있어서,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거지요. 모세는 하느님과 백성을 중계하여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었는데요, 율법은 오히려 율법주의로 발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과 백성을 가로막는 너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마음을 어둡게 하는 너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완전히 걷히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나날이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간다고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의견은 자신의 체험에 입각되어 있는 것인데요, 그의 체험은 바오로가 신도들을 박해하기 위해 가다가 다마스커스 길에서 만난 예수님이십니다. 그 때 바오로는 예수님을 큰 빛의 형태로 만났었지요. 그 후 이 빛은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로 하여금,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미래의 모습으로 그리게 했지요. 사도 바오로는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너울을 율법이라고 강조했는데요,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조상들과 자신이 그토록 신봉하던 율법을 과감히 버림으로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너울은 무엇일까요?

복음묵상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계명이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는 화도 내지 말고, 욕도 하지 말고, 원한 품게도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확장됩니다. 이 말씀은 어느 정도 예수님의 정신을 반사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율법에서 규정하는 그 정도만 지키고 그 이상은 나아가려고 하지 않은 반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율법이 정한 선에서 멈추어 버리지 말고, 항상 조금만 더 나아가도록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확장하신 것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항상 사람들이 됐다고 하는 선에서 조금만 더 잘하시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오리를 함께 가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십리를 함께 가주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고,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돌려 대주라고 하셨지요.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청을 들어주라는 예수님이셨으니까요.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이만하면 됐다는 선을 금그어 놓고, 그만큼만 실행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인데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금그어 놓은 선을 꿰뚫어 보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선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라고 이끄십니다.

살인하지 말뿐만 아니라, 이웃을 욕하거나 비방하지도 말고, 이웃에게 화를 내거나 나쁘게 하지도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 자신들도 알게 모르게 금을 그어놓고 사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만큼만 하지는 한계선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놓은 한계선에서 한 발자국 넘어서는 지점에 바로 하느님 나라의 국경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정한 한계선에서 한 발짝만 더, 조금만 더 나가는 곳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국경이 시작되는 거지요.

오늘도 함께 하소서

예수님, 우리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보다 조금만 더 잘할 수 없을까요? 우리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잘할 수 없을까요?

솔직히 고백하건데, 저희들은 당신을 따른다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 어떤 한계를 그어 놓고 그 이상을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 일까요, 아니면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 일까요......

저희들은 계명을 지키는 선에서, 좀 더 나간다면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양심의 부담이 없어지는 선에서 멈추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좀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 당신께서는 저희들이 우리 자신들이 금그어 놓은 한계선을 한 걸음 훌쩍 넘어설 때, 그곳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국경이 시작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경험이 별로 없어서 일까요. 우리 자신 넘어 무한한 자유와 기쁨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고 당신께서 가리키지만, 저희들은 훌쩍 우리 자신을 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한계에 매달려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저희들이 우리 자신들이 금그어 놓은 선에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게 이끌어 주십시오. 지금보다 조금 더 미소짓게 하시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친절하게 하시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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