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8월24일 독서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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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한구 | 작성일1999-08-18 | 조회수3,592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8월 24일 화요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독서묵상 오늘 독서에서 묵시록은 종말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 후 새롭게 태어나는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묵시를 담고 있습니다. 묵시록에 의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 다음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나타나게 될 터인데, 12사도 위에 세워진 교회가 새로운 예루살렘이 될 거라는 묵시입니다. 그 교회는 어린 양의 신부이지요. 따라서 요한 묵시록의 이러한 표현에 따라서 어린양의 신부’와 ’천상 예루살렘’은 초 세기의 교부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였던 교회의 표상이 되었답니다. 그러면 요한 묵시록의 천상 예루살렘의 표현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기원전 끝 세기와 기원 후 초 세기에 유대인들의 의식을 지배했던 종말론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종말론은 두 가지로 발전하고 있었는데요. 하나는 하느님의 지배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끝이 났고, 종말에 다시 회복되게 될거라고 생각하였지요. 원죄 이전에 있었던 무죄 상태가 시간의 끝에서 다시 회복될 텐데요. 그전에 먼저 악과 우주의 나쁜 세력들은 반역하는 인류와 함께 하느님의 뜻을 반역하게 될거라고 여겼지요. 또 다른 하나는 다윗왕권의 회복이었는데요. 여기서 하느님의 지배는 북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의 멸망으로 끊겼다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과 이방인들의 추방으로 기원 전 2세기의 마카베오 밑에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지배는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됨으로서 다시 중단하게 되지요. 따라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하느님 지배가 요원한 것으로 여겼답니다. 그 반면 요한의 묵시록은 하느님의 지배가 예수 그리스도님으로 해서 이미 시작되었고, 당시의 박해 상황을 종말에 있을 악의 세력의 난립으로 판단했지요. 따라서 지금 박해를 받고 있지만 신도들은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와 천상의 예루살렘인 교회를 그리면서 악의 세력을 이겨나갈 것을 독려하였답니다. 복음묵상 오늘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12사도의 명단에서 필립보와 쌍으로 나오기 때문에, 교회는 전통적으로 나타나엘의 소명 이야기에 나오는 나타나엘을 바르톨로메오 사도라고 해석합니다.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첫 만남을 그린 오늘 복음 이야기는 만남에 대한 무척 아름다운 이야기인데요.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놀라움과 영적 감동에 휩싸인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필립보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분과 나자렛 사람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대립해 있지요. 유다인들은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갈릴레아 반이방인 지역인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유다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당연히 예언된 대로 유다 지역 다윗 가문에서 나와야 하니까요. 나타나엘은 점잖고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소 성격이 급한 친구가 앞 뒤 가리지 않고 흥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나타나엘은 친구에게 퉁명스럽게 대구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지만 나타나엘은 친구의 간곡한 부탁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데요. 예수님과 나타나엘이 만나 대화하는 장면은 초월적인 신과의 영적인 만남의 장면을 상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시선 앞에 나타나엘은 자신의 존재의 헐벗음을 느끼게 되지요. 그래서 나타나엘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저를 아십니까?"하고 묻게 됩니다. 예수님은 "필립보가 너를 찾기도 전부터 너를 보았다"고 말씀하시지요. 하느님이 우리가 하느님을 찾기도 전부터 우리 자신을 알고, 귀히 보셨듯이 말입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과 선문답같은 대화를 나눈 후,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고, 자신을 완전히 예수님께 승복하는데요. 예수님과 우리의 첫만남을 어떠했을까요. 오늘도 함께 하소서 예수님, 당신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알아보기 전부터 우리를 아셨고 눈여겨보십니다. 길거리에서 스치기도 하고, 공원 의자에 앉아있을 때나 집 주변의 언덕을 산책할 때나, 혹은 시장주변을 기웃거릴 때 우리는 당신을 스치기도 하고, 눈인사를 하고 지나가기도 하지만, 어쩜 저희들은 당신을 알아채지도 못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저희들은 나타나엘처럼 강렬한 인상으로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께서는 저희 내면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저희들은 저희 존재를 완전히 드러내 놓은 상태에서, 당신을 마주 바라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당신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고, 당신은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여주시고...... 예수님, 그때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릴 테지요. 예수님, 생의 단 한번만이라도 열렬한 마음으로 당신을 만나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을 만남으로서 우리의 생이 바뀌고, 우리의 삶이 사랑과 희망과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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