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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3주일 나해
작성자조명연 쪽지 캡슐 작성일1999-12-12 조회수2,240 추천수6 반대(0) 신고

내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

 

복음의 여러 곳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낙타 털옷과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벌꿀만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갈대가 무성한 요르단강에서 대대적인 세례 운동을 벌였으며, 곧 다가올 하느님 나라와 심판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바로 이런 그의 모습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라는 소리도 들었지요. 그는 왜 이런 삶을 선택했을까요?

요즘에는 다이어트를 위해서 돈을 주고 굶는 사람도 많다고 하지요. 세례자 요한 역시 살을 빼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을테고요. 또 도를 닦기 위해서 광야로 나간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보통 사람과 이런 다른 모습이 어떤 부와 명예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그는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받고 있었으며, 많은 추종자가 있었지요. 또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다인들은 그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지지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시기로 하신 그리스도이십니까?" 만일 세례자 요한이 "어떻게 아셨소. 내가 바로 오기로 했던 메시아인 그리스도요."라고만 말했어도, 남은 여생을 고생하지 않고 편안히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 여자의 춤 값으로 목숨을 잃지도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나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이오. 그런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이분이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오."

자기에게 굴어온 복을 걷어차 버렸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그는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기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비록 무대 뒤편으로 이름 없이 사라질 것이겠지만, 자신의 준비로 사람들이 이제서야 메시아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이렇게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즉, 비록 모든 관심이 자기 보다 뒤에 오실 예수님에게 돌려지겠지만 이 자체로도 그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세상의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만 얻는 것은 아닙니다. 기쁨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의외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대학을 졸업하던 해, 연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약간 덤벙거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인에게 아주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지요. 그래서 그는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끙끙 앓고 있었어요. 결국 연애편지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몇 장씩이나 종이를 버려 가면서 마침내 편지 한 장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편지를 친구에게 평을 받기 위해서 보여주었지요. 그런데 이 편지의 내용은 보통의 연애편지처럼 감미로운 미사여구가 가득 찬 것이 아니었어요. 제가 그 편지의 주 내용을 읽어 드릴께요.

(…저는 지금 대학 졸업반입니다. 졸업만 하면 곧 훌륭한 회사에 취직하여 성실한 모범 사원이 되겠습니다. 당신과 결혼해 행복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만이 저의 꿈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런데 이 사람은 얼마나 흥분을 했는지 연애편지를 봉투에 넣는다는 것이 그만 이력서와 바꿔 넣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다니고 싶었던 회사의 사장에게 연애 편지를 보냈고, 연인에게는 이력서를 보냈던 것이죠. 물론 이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알지 못했어요.

그러나 세상일이란 참 이상한 것이어서 잘못 보내어 진 편지가 오히려 그에게 더 없는 행운을 불러 왔다고 합니다. 즉, 이력서를 받아 본 연인과 그녀의 아버지는 이만한 신원이면 신랑감으로 충분하다는 평가를 내렸고, 한편 그 연애 편지를 보았던 회사 사장은 그 사람의 굳센 결심과 정열 때문에 회사에 입사시켰지요.

이 사람의 체험이 조금 특이하게 보이지만, 사실 기쁨은 멀리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아니 우리 곁에 늘 함께 하는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또한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물질적인 것에서 기쁨을 찾으려고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는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우리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도 메시아 시대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권고하고 전해주는 이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바로 세례자 요한과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을 생각해서 그 분을 위해서 내 자신을 겸손되게 봉헌하려고 할 때, 우리는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한 해의 달력도 마지막 한 장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올해의 끝은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한 해의 끝이자, 한 세기의 끝이며, 한 밀레니엄의 끝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제법 커다란 문턱을 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시기에는 보통 기대와 불안감이 강렬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론이나 출판산업들은 이 세기말에 대한 말들 참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삶 안에서 겸손된 마음을 갖고 기쁨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기대와 불안을 얻기보다는 더 큰 삶의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천년 대희년. 희년의 기쁨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감추어진 우리들의 기쁨을 이제 꺼내어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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