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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초여름을 맞이하며(승천대축일강론)
작성자황인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0-06-03 조회수2,602 추천수14 반대(0) 신고

예수승천대축일강론

 

유월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여름날씨가 시작되었다. 아침 저녁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지만 한 낮에는 그늘을 찾고 싶어진다. 산골짜기 날씨가 이러니 다른 곳은 어떠할까? 그래도 뜨거운 태양이 원망스럽지만 만물이 성장하는데 광합성이 필수적이니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하리라.

엇그제 자동차 매연과 아스팔트에서 뿜어나오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잠시 다니러 갔던 서울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오며 혼자 시원한 산골에서 지내는 것 같아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올 여름 장마가 일찍 시작되어 일찍 끝난다고 하니 잠 못 이루는 열대야 때문에 도시에서 살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고생스러울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여름만 되면 어느새 이런 걱정을 수없이 반복하게 되는 것은 나만의 기우라면 좋으련만 ...

 

오늘은 예수님께서 지상생활을 마치고 하느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는 예수승천대축일이다. 사도행전 1,3에 따르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동안 사도들에게 자주 나타나셔서 여러 가지 증거로 당신이 확실히 살아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루가가 기록한 사도행전과 달리 네 개의 복음서가 예수승천을 일관되게 증언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은 승천하지 않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을 위해 기록한 이 복음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임마누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한다(마태 1,23). 예수님이 승천해 버리시면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하느님이 된다. 그래서 마태오는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을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마태 28,20)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나도록 편집하였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자신들과 동고동락하시는 분이어야 했다. 그러니 유대교나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에게 승천의 의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르코복음에 나오는 승천이야기도 일부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2세기에 어떤 사람이 덧붙인 이야기라고 한다. 그래서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마르코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마르 16,19)은 큰 의미가 없는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서도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간접적으로가 아니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떠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갑니다"(요한 16,28)라는 구절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예수님(요한 1,1)이 다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갔다고 추측할 뿐이다.

 

이에 비해서 루가가 기록한 전편(루가복음)과 후편(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특별하게 강조한다. 왜일까? 우선 루가는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로의 제자였다. 그래서 루가는 복음소식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땅 끝까지 전파된다는 보편주의적 구원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바오로가 아니면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지역의 소종파로 끝났을 그리스도교이다. 우리와 같은 동방민족이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바울로 사도 덕분이다. 영원히 찬양 받으실 바울로 사도여!

이런 스승의 위대한 업적도 제자 루가가 우리가 읽고 있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신학적으로 정리해 놓지 않았다면 공염불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래서 루가는 스승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려 했던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소상하고도 체계적으로 기록한다.

루가는 예루살렘이 복음의 발상지로서 매우 중요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곳은 유대교가 대종교로 텃세를 부리며 새로 자라나려는 어린 새싹같은 그리스도교를 무자비하게 박해하고 있던 장소다. 박해의 강도는 스테파노의 순교사건(사도 6장)을 통해서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이해서 그리스도교는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선교의 둘도 없는 기회로 삼는다. 유대교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로 믿었던(로마 9-11장) 사도 바울로는 자기 동족들의 불신을 안타까워 하며서 전도여행을 떠난다.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기면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로의 활약상은 사도행전의 처음부터 마지막 부분까지에서 잘 나타난다.

 

그래서 루가는 자신의 첫째 복음서의 마지막 장면(루가 24,50-52)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장면을 간략하게 보여준 다음에 이어서 루가의 둘째 복음서로 일컬어지는 사도행전의 첫 장면에서 다시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장면을 더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두 책에서 루가는 예수님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만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마르코 복음서는 갈릴래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뵐 수 있지만 예루살렘은 어두운 장소로 묘사한다. 마르코는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 대제관들에게 붙잡혀 사형선고 받는 장소라고 나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러고 보면 복음서가 같은 내용 같지만 그 사상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서공부를 올바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튼 루가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있을 때 예수님이 승천하신다고 사도행전에서 자세하게 전해준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남기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전권을 행사해서 이스라엘을 재건하시겠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정하셨으니 여러분이 알 바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내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들이 될 것입니다"(사도 1,7)라고 대답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가신다. 자신들을 남겨두고 떠나시는 예수님을 넋놓고 쳐다보는 제자들에게 흰 옷 입은 사람(물론 천사겠지)이 나타나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저 예수는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라고 위로한다.

 

루가의 이런 기록들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은 우선 우리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자 함이었다. 이제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들에게 유익하다"(요한 16,7)는 예수님의 말씀도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들과 함께 계실 수 있어도 우리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실 수 없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열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온갖 시력과 역경 속에서 인내할 수 있는 굳셈, 그리고 인생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지혜, 모든 피조물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지식, 그리고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려는 효성, 마귀도 쫓아내고 여러 가지 기이한 언어로 말도 하고 뱀을 만지거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 능력(마르 16,17-18) 등은 예수님이 승천하셨기에 받을 수 있는 성령의 선물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우리 힘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올바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은 우리 모두와 함께 계시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었다. 유대교는 이 세상에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었다. 만일 마태오복음 처럼 예수님이 승천하시지 않고 지상에 머물러 계셨다면 우리 같은 이방인들은 주님을 결코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버리고 떠나가신 것 같지만 사실은 성령을 대신 보내주실 계획을 세우심으로써 영원히 모든 사람들과 더 가까이 계실 수 있게 되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야 말로 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인 것이다.

 

셋째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시면서 이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하라(마르 16,15; 마태 28,18-19; 루가 24,47; 사도 1,8)는 지상명령을 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사상은 개인 구원에 있지 않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의 구원이 이루어지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참다운 보편적인 구원사상이다. 그런데 그 동안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모상을 닮은 인간의 구원이 우선적이라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들은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로마 8,22)라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우주)이 구원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온갖 매체를 이용해서 선교를 해야한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의 영혼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교회의 가르침은 이제 종식되어야 한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가 두 발을 딛고 기다려야 할 곳은 이 세상이다. 하늘에서 기다릴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은 우리 육신이 잠시 잠깐 살다가 떠날 곳이지만 우리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행복하게 살아야할 소중한 곳이다. 그런데 인간이 숨을 쉬고 살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 버린다면 죽은 다음에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것이다.

 

대지가 뜨겁게 달궈지는 초여름이다. 시원한 산과 계곡이 어찌 그리운 시절이 돌아오고 있다. 그렇다고 나처럼 이런 산골에서 시원하게 여름을 지낼 수 없는 도시에 살고 있는 분들이 너무 가엽게 생각이 된다. 조그만 공간만 있으면 집을 짓고 시멘트 포장을 하려고 했던 각박했던 지난 우리들의 삶의 유산이다.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를 소중하게 생각했어야 했고, 만물을 소생시키고 정화시키는 흙의 소중함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 그렇다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절망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한 이런 세상에서 자라고 있고 앞으로 태어날 우리의 후손들이 불쌍하게 생각된다.

최근에 부모를 살해하고 여섯 토막으로 잘라 버린 어떤 청년이 있었다. 인성교육의 부재라고 떠들어대고 있지만 시멘트로 이루어진 삭막한 도시 환경을 만들었던 우리 기성인들의 탓 때문에 그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것만 같다. 그 청년의 인생이 너무 불쌍하다. 한 번 뿐인 삶인데 그토록 허무하게 끝내야 하다니.. 그래도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라도 해 주어야겠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그 청년을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 예수승천대축일이자 홍보주일을 맞이해서 내가 두 발을 딛고 살면서 예수님을 기다려야 할 이 세상이 온갖 인간의 탐욕과 착취로 병들어가고 있는데도 우리 신앙인들이 ’예수 믿으면 복 받고 구원받으니 우리 성당에 나오세요’라는 구호를 외쳐야 승천하시며 남겨두진 지상명령을 따르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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