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니 도와야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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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양순 | 작성일2000-06-04 | 조회수2,061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쌍용사보 여의주 2,3월호에서 여의주가 만난 사람들 2에서 펌글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니 도와야지요
장애인 자원 봉사자 김도순 씨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니 도와야지요
장애인 자원 봉사자 김도순 씨
늦 겨울 찬바람이 부는 토요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성내역 근처의 한 주택가에서 취재팀은 장애인 자원 봉사자 김도순 씨(56세)를 만났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많아요. 난 그들을 도우면 행복해져요.”
김씨는 처녀 시절에 불구가 된 왼쪽 다리를 절며 골목을 나온다. 아픈 다리 때문에 간신히 몸을 끌어올려 56번 시내 버스에 오른다. 자신이 장애자이면서도 심신 장애아들을 위해 봉사하러 가는 길이다.
필자는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었다.
“소문을 들으니 하루 간격으로 봉사를 다니신다면서요?”
김씨는 그냥 빙그레 웃는다.
“여고 동창생 모임에 가도, 친목회에 가도 자랑들이 너무 많아요. 나는 늘 실망하고 심란해져서 집에 돌아왔어요. 내가 불구라는 것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난 뭐냐 하는 자격지심으로 스트레스가 생겨 두통까지 났지요. 그러다가 자원 봉사를 나오자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었어요.”
김씨는 일 주일에 사흘 자원 봉사를 나선다. 마치 봉사를 위해 사는 사람 같다. 화요일에는 온종일 정서 장애 특수학교인 송파구 장지동의 육영학교에서 고등부 학생들에게 미싱을 가르친다. 젊어서 기계 미싱을 배웠고 강사 경력까지 있기 때문이다. 목요일은 송파 재활용 센터에서 무보수로 일하며 환경 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토요일엔 오금동의 정신 장애자 수용 시설인 소망의 집에 가서 빨래를 하고 목욕시키는 일을 한다. 하루 걸러 나서는 바람에 집안 살림이 소홀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남편 이근형 씨(59세)는 잘도 참아 준다. 자원 봉사자에게 주는 표창이라는 표창은 거의 모두 받았지만 이웃도 친척도 그걸 잘 모른다.
김도순 씨는 서울 문성여상 졸업 직후 관절 결핵을 앓았다. 온갖 약을 다 쓰며 투병했지만 다리를 절어야 하는 장애자의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는 왜 이럴까. 내가 무슨 죄를 졌기에 장애자가 되었을까.’ 늘 억울하고 우울하게 자기 운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자원 봉사를 시작한 것은 95년 장애인 무료 운전 교육 혜택을 받고서였다. 그 때 그를 가르친 사람이 장애인이었다.
‘아, 나처럼 불구인 사람도 남을 도울 수 있구나. 나도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김씨는 소박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송파구청의 자원 봉사 센터를 찾아가 등록했다. 그 후 다섯 해 동안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봉사를 하고, 센터의 여러 개 자원 봉사 서클 중 하나인 동그라미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건설업을 하는 남편 이근형 씨는 많이는 못 벌어와도 그럭저럭 살 만하고 미혼인 외아들도 자기 밥벌이는 한다. 풍족하진 않지만 별 아쉬움은 없다.
이 날은 김씨가 소망의 집에 가는 날. 오금동 사거리 56번 종점에서 김도순 씨는 버스에서 내렸다. 빨래하기에 좋은 작업복을 넣은 손가방을 고쳐 들고는 멀리 골짜기에 흰 눈을 안고 있는 남한산성을 한 번 바라보고 불편한 다리를 내딛는다. 발이 멈춘 곳은 큰길에 연한 우인빌딩.
김도순 씨는 취재팀에게 ‘소망의 집’이라고 쓴 4층의 작은 간판을 가리킨다.
“저기예요. 불쌍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이 서른 명이나 있어요.”
김씨를 따라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다. 문을 여는 순간, 십여 명의 장애아들과 그들을 돕기 위해 찾아온 여성 자원 봉사자들이 한눈에 가득 들어온다. 모로 누워 괜히 싱글거리는 아이, 스무 살이 가까워 보이는데도 초콜릿을 달라고 떼를 쓰는 심신 장애 청년, 부득부득 옷을 벗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열여덟 살쯤 된 정신 지체 처녀.
“여기 소망의 집 이야기를 「여의주」에 잘 써주세요. 참 어렵게 살림을 꾸려 가고 있거든요.”
김도순 씨는 간곡하게 말한다. 한사코 거절하던 김씨가 취재를 승낙한 것이 이곳의 어려움을 알리려는 생각 때문이었음을 아는지라 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망의 집은 20평쯤 되는 놀이터 겸 중앙 홀이 있고 네 개의 작은 방과 목욕실이 있다. 김도순 씨는 빈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두 팔을 썩 걷어붙이고는 대여섯 살 된 소년을 안고 욕실로 들어간다.
“형준아, 엄마하고 목욕하자.”
첫돌이 지난 뒤 장애아임이 밝혀지자 부모에게 버림받고 골목에 버려졌다는 형준이는 어린애처럼 깔깔 웃는다. 김도순 씨는 아이를 타일 바닥에 눕혀놓고 정성스럽게 닦아준다. 손길이나 눈빛이 친어머니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소망의 집에서는 김도순 씨말고도 열 명쯤 되는 여성 자원 봉사자들이 부산스럽게 손을 움직인다. 빨래하고, 주방에서 점심거리를 만들고, 칫솔로 이를 닦아주고, 옷을 갈아 입히고…. 모두 익숙하게 척척 몸을 움직인다. 김도순 씨처럼 나이 든 사람들도 있지만 젊은 주부들도 있다.
필자는 박현숙 원장(39세)을 붙잡고 김도순 씨에 대해 물었다.
“저 분은 봉사를 위해 태어난 분 같아요. 힘든 일을 하면서도 낯을 찌푸리는 걸 못 봤어요.”
박 원장은 김씨의 솔선수범을 몹시 고마워했다.
IMF 경제 위기는 인정의 손길을 뜸하게 만들었다고 박 원장은 안타까워한다. 소망의 집은 월세로 130만 원이나 내고 연료와 옷가지와 먹거리를 사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간다. 박 원장이 양말을 팔아 번 돈을 모두 쏟아 붓지만 자립은 어림도 없다. 어쩌다가 후원금을 보내오는 분들이 있지만 이삼 년 전보다 적다. 그래도 자원 봉사자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 게 고맙기만 하다. 김도순 씨는 그들 가운데 가장 고령으로 이미 1천 시간 봉사 기록을 가지고 있다.
김도순 씨는 장애아들에게 점심을 떠먹여주고 오후에는 빨래를 했다. 어제 세탁한 옷을 다림질하고,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었다. 저녁상을 차릴 때쯤 겨울의 짧은 해가 넘어갔다. 직장이 있어서 저녁에만 시간을 낼 수 있는 자원 봉사자들이 찾아와 낮에 애쓴 자원 봉사자들과 교대했다. 봉사를 끝낸 여성 봉사자들은 지친 모습으로, 그러나 평온하고 행복한 얼굴을 하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그 가운데 김도순 씨도 끼여 있었다.
“장애자인 내가 다른 장애인들을 돕는 것이 정신적인 자기 기만이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좋아요. 이렇게 봉사를 하고 집을 돌아갈 때 가슴이 행복으로 충만하니까요.”
“언제까지 봉사를 하실 건가요?”
“내가 힘이 있어 걸을 수 있을 때까지요.”
사위가 어두워오는 저녁, 김도순 씨는 머플러로 얼굴을 싸매고 바람을 피하면서 종점으로 걸어갔다. 집으로 가기 위해 56번 시내 버스에 오르는 김도순 씨. 불구인 다리를 애써 끌어올리는 모습이 조금은 힘들어 보였다.
연락처 소망의 집 02-406-4971
글 이원규 사진 이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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