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너는 나를 따라라.(QT 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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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이경 | 작성일2000-06-10 | 조회수2,434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말씀> "설사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21,22)
<묵상> 요한 복음의 맨 끄트머리에 왜 이런 내용이 실려 있을까? 좀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져보자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내게 깨닫게 하시려는 바가 무엇일까? 요한이야 말로 예수님의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임을 알리기 위해서 였을까. 사도 요한, 혹은 요한의 제자군들이 요한 복음의 권위를 거듭 강조하기 위하여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한 것일까.
묵상을 하며 나는 고민에 빠졌고, 언제나처럼 주님께 여쭈어보았다. 문득 비교와 경쟁심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총애(?)는 다른 제자들의 촉각을 곤두세우는 관심거리였음이 틀림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요한은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는 구절(23절)은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그 저변에 함축되어있는 질시와 선망의 미묘한 감정마저도 가늠케한다.
인생이란 어느 면으론 참으로 쉴새없는 비교의 연속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형제, 자매들 사이에서 비교하게 되고, 자라면서는 친구, 동료들과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부대끼기 마련이다. 어디 그뿐인가. Freud의 유명한 가설 외디푸스 컴플렉스 역시 남아가 아버지를 상대로 비교와 경쟁함에서 비롯되는 무의식적 갈등의 산물아닌가. 비교는 곧 열등감을 낳게 되고 열등감 속에서 비틀린 나의 왜곡된 자아는 나와 타인에게 상처와 불행감을 심어주곤 한다.
오늘 예수님께서 두번씩이나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22& 23절)라고 강조하신 것은 요한이야말로 예수님의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임을 재차 알리기 위해서는 분명 아닐 것이다. 저마다, 살아가는 모양에 따라 주님은 각기 다른 평가를 하실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사람의 안목이나 가늠과는 다르리라는 것이다. 그의 믿음의 어떻고, 살아가는 모양새가 어떻고는 내가 볼 수 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주님께서 그를, 그리고 나를 진정으로 어떻게 여기실지 나는 알 수 없다. 남의 언행이 설령 내 눈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고 손가락질 받을 처신이라 해도 예수께서 그를 어찌 여기실지, 어떤 애정과 소망의 눈길로 바라보실지 누가 알겠는가.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나와 예수님의 관계이다.
’... 너는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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