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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데레사 할머니와 만남과 추억
작성자황인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0-09-11 조회수3,194 추천수37 반대(0) 신고

데레사 할머니와 만남과 추억

해마다 추석명절이면 잊혀지지 않는 할머니가 있다. 올해 80세 되신 데레사 할머니다. 할머니와 나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96년 이 시골본당 신부로 부임했을 때 미사 때면 늘 앞줄 의자에 할머니는 앉으셨다. 그런데 연세가 많아서인지 눈물이 줄줄 흐르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 성당에 오시곤 했다. 나중에 가정방문을 가보니 할머니가 홀로 오두막집에서 연탄을 때서 밥을 끓여 잡수시며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활하고 계셨다. 방 안에는 텔레비젼, 전기밥솥 그리고 소형냉장고가 놓여있고 윗목에는 요강도 함께 놓여있었다. 겨울에는 추우니까 방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시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저녁 지나가다 불쑥 예고도 없이 들렀더니 텔레비젼도 보시지 않고 일찍 주무시는 것이었다. 텔레비젼이 고장났으니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으면 적적하다고 일찍 잠자리에 드신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날 원주에 가서 중고 텔레비젼을 구해다 설치해 드렸더니 너무 기뻐하셨다. 어느새 할머니는 녹차를 탔으니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하셨다. 마시려는데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티백으로 된 차이기에 봉지 째 뜨거운 물에 넣어야 하는데 가위로 잘라서 타신 것이었다. 할머니의 전화비는 빵 원이다. 왜냐하면 전화를 받을 줄 아시지만 거실 줄은 모르시기 때문이다. 생활보호대상자이니 기본요금도 면제해 주나 보다.

 

데레사 할머니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은 나의 사목활동에 큰 기쁨으로 남을 것 같다. 본당에 부임해서 보니 이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본당 신자의 70%가 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당신부 노릇보다 효도 노릇하는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효도관광을 자주 다니고 본당에서 여러 번 잔치를 베풀어드렸다. 그러자 노인이라고 소외당하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왕 효도 노릇하는 거 더 잘 해보고 싶어서 96년 겨울에 제주도로 성지순례를 가게되었다. 20여분을 모시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비행기를 타려고 활주로를 왕복하는 셔틀버스를 탔는데 데레사 할머니가 내 손을 잡더니 "신부님, 비행기가 버스와 똑같네"하시는 것이었다. 76년만에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시고 제주도 여행을 하시게 된 할머니는 처음에는 제주도에서 장례미사를 치르게 될까 근심하던 나의 기대와는 달리 정말 신나게 구경 다니셨다. 2박 3일간의 짧은 여행기간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할머니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기뻐하시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삶의 의미를 다시 찾게 된 할머니는 그 후 본당의 레지오 단원으로 성당에 오시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여기며 지내신다.

 

한 번은 내가 몸살로 끙끙 앓고 있을 때였다. 사제관 문을 열어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노크도 하지 않고 불쑥 들어오셨다. 그리고는 내 이마에 손을 얹으시고는 안수기도를 해 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손길같이 느껴져서  가만히 있었다. 한 참을 기도하시더니 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셔서 내 베개 옆에 놓으시며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그러시지만 데레사 할머니는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서 가끔 내게 갔다 주신다. 나는 이곳에서 효도 노릇하는 신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나서 오히려 할아버지 할머니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산다.

 

이제 나도 이 본당에 부임한지 5년째이기 때문에 이동할 준비를 해야 될 때가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효도 노릇 잘 해보고 싶어서 지난 6월에는 데레사 할머니를 비롯해서 40여 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시고 북경으로 효도관광을 다녀왔다. 북당, 남당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자금성, 천안문, 만리장성, 용경협, 이화원 등 북경관광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노인들을 모시고 여행 갔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이 정말 쓸데없는 기우였다고 확신이 들었다. 노인이라고 집 안에만 가만히 들어 앉아있으라는 것은 젊은이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의 어르신들은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는 기력이 있다. 노인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해 줌으로써 그들도 우리 사회의 어엿한 일원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노인복지정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만리장성을 올라가면서 데레사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힘들지 않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집에서 밥해먹고 밭에 나가서 김을 맬 때는 온 몸이 쑤시고 기운이 없더니, 신부님하고 여행 다니니까 몸이 가볍고 아픈 데가 하나도 없어"하고 대답하셨다.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3박 4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마자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또 가시고 싶으시단다.

 

데레사 할머니가 어제 추석을 지내시러 주문진 아들네 집으로 갔다. 할머니는 세 번 시집을 가셨다. 주문진 아들은 둘째 남편의 아들인데 다리를 잘 못 쓰는 장애자이다. 첫째 남편은 육이오 사변 때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죽었다. 둘째 남편과는 아들 하나를 낳고 잘 살다가 병으로 먼저 떠나보냈다. 셋째 남편과는 지난 93년 사별했다. 할머니가 살아온 시대는 일제 치하와 육이오 동란으로 몹시 어지러운 격동기였다. 봉평에서 태어난 할머니가 젊었을 때 아무 재산도 없이 청상과부로 살아가는 것을 불가능했다. 동네의 남정네들이 가난한 과부댁을 그냥 둘리 만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영감을 얻어 살아야 했다고 하신다. 할머니는 이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살 수가 없으니 영감을 얻어서 살았는데 먼저 갔어". 할머니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고 애환이 많았을까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할머니는 세 명의 영감들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영감이 먼저 병을 얻어 앓아 누워 있어도 할머니는 극진히 간호했다. 영감들이 할머니에게 잘 해주었기 때문에 자신도 최선을 다해서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추석, 설 명절 그리고 위령성월만 되면 세 명의 남편들을 위해서 위령미사를 드린다. 박인득, 이망기, 최재선. 할머니가 늘 연미사를 신청하기 때문에 나도 이름을 외운다. 주일 미사를 마치고 추석 세러 주문진 아들네 다녀올 테니 위령미사 드려달라고 하얀 봉투에 이만 원을 넣어서 주고 가셨다.

 

데레사 할머니!

지난 번에는 신협에서 출자 배당금을 받았다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미사 드려달라고 내게 삼십만 원을 맡기셨죠. 걱정하지 마세요. 제 이 시골 성당에 와서 할머니를 만나서 너무 행복했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잊지 않고 미사 드려드릴께요. 언제나 건강하시고 하느님 사랑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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