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산책 (연중3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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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4-01-30 | 조회수1,604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 2004년 1월 30일 (금) -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마르 4,26-34 <씨앗을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앗을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모른다.>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27)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31)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32)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비유로써 말씀을 전하셨다. 34)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스스로 씨앗이 되어야 함을...
오늘 복음은 나머지 두 개의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절)와 ’겨자씨의 비유’(30-32절)를 한꺼번에 들려준다. 각 비유의 시작(26절, 30절)에서 직접 언급되었듯이 비유의 주제는 하느님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이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낟알을 맺는 이삭으로 성장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어느 씨앗보다도 작은 것이지만 땅에 심겨지면 새들이 둥지를 틀고 그 그늘에 쉴 수 있을 만큼 큰 푸성귀(나무; 마태 13,32)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비유의 특징은 시작과 끝의 대조, 작고 하찮은 것에서 시작하여 놀랍고 엄청난 결과로 끝맺는 대조(對照)에 있다.
오늘 두 가지 비유를 첫 번째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이해는 더 빨라진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아주 열악한 환경, 즉 길바닥이나, 흙이 많지 않은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을 제외하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그 토양의 조건에 따라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따라서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진 경우에 한하여 세 가지 비유를 모두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세 가지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씨앗(seed)’과 ’성장(growth)’과 ’열매(fruit)’이다. 이 셋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요소들로서 씨앗은 시작을, 성장은 과정을, 열매는 마지막 결과를 뜻한다. 시작은 어떤 경우에든 작고 미약하다. 마지막 결과인 열매는 놀랍고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 해당되는 성장은 사람의 머리로는 잘 파악할 수 없는 신비에 덮여있다. 이렇게 하느님나라는 작고 미약한 복음의 씨앗을 시작으로 누구도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성장과정을 거쳐 진정한 하느님나라로 완성된다. 이 완성은 곧 ’낫이 사용되는 추수의 때’로서 종말을 의미한다. 하느님나라의 완성은 조그만 씨앗이 놀라운 열매를 내듯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아무도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없다. 농부라면 씨앗에서 열매까지의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농부에게조차도 성장의 신비는 놀라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놀라운 성장의 신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하려는 자는 스스로 씨앗이 되어 땅에 묻혀야 한다.
오늘 두 가지 비유의 청중은 누구인가? 앞서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청중은 호숫가에 모여든 모든 군중이었고, ’등불의 비유’와 종말보상률에 관한 훈시는 12제자와 다른 특별한 제자들에게 한정된 말씀이었다. 비유설교의 마지막 부분(33-34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 복음의 두 가지 비유는 다시금 전체 군중을 향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여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있는 사람에게는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고 한다. 웬 차별인가? 예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9절, 23절)고 하시면서 왜 군중과 제자들을 차별하시는 것일까? 제자들이 두 귀 말고도 다른 ’들을 귀’를 달고라도 있는 것일까? 군중과 제자들을 따로 차별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권한에 속한다. 즉 예수님 마음이다. 그러나 군중에게도 여전히 ’들을 귀’를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기회는 있다. 반면 제자들에게도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들을 귀’를 단계적으로 시험받아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 따라서 누구에나 하느님나라의 복음은 열려있고, 복음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복음은 처음에는 씨앗과 같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씨앗이시듯이 제자들도 씨앗이 되어야함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스스로 씨앗이 되는 자만이 하느님나라의 성장신비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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