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산책 (연중 제4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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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4-02-01 | 조회수1,586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 2004년 2월 1일 (일) - 연중 제4주일 (다)
[오늘의 복음] 루가 4,21-30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21)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23) 예수께서는 "너희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하시고는 24)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잘 들어라. 엘리야 시대에 삼 년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26)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 주셨다. 27)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 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사람도 고쳐 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 28)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모두 화가 나서 29)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열광과 증오가 공존하는 거울
우리는 지난주일(연중 제3주일)의 복음을 묵상하면서 본격적인 연중주일의 시작이 연중 제3주일부터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사실은 연중 제3주일에 봉독되는 복음들(가해: 마태 4,12-23/ 나해: 마르 1,14-20/ 다해: 루가 1,1-4; 4,14-21)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었다. 공관복음에 속하는 이 복음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보도하고 있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의 투옥으로 말미암아 그의 공적 활동이 강제적으로 종료되자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에서 개시(開始)한 예수님의 공생활을 보도하고 있으며, 루가는 예수께서 자라나신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회당에서 행하신 설교를 복음의 서문과 함께 보도하였다. 아울러 루가는 ’지금 그리고 여기’ 라는 자신의 고유한 시간과 공간개념을 도입하여 예수님의 공생활 개시시점을 초시공화(超時空化)함으로써 서술적인 시공(時空)에 매어두지 않았음을 보았다.
오늘 연중 제4주일의 복음은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설교의 후반부를 들려준다. 후반부는 예수님의 설교(전반부)에 대한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을 시사하고 있다. 복음의 서두는 편의상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는 지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반복하였다. 이 반복은 이사야의 예언말씀이 예수에게 있어서 그만큼 중요함을 의미한다. 예수의 시대로부터 약 5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하여 선포된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58,6-7; 61,2)는 예언의 말씀이 이제 예수를 통하여 예수께서 계신 바로 ’이 시간과 이 장소’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언 속의 ’나’를 자신으로 간주하신 것이다. 이 성취는 과거의 실현(實現)이며 미래의 선취(先取)를 의미한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가 이 복음을 선포한다면, 이 또한 2,000년 전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성취된 것을 말하며,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성취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즉각적인 반응은 예수와 예수의 말씀에 대한 칭찬과 탄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반응은 곧바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는 반감(反感)으로 돌변한다. 예수께서 이사야의 예언 속의 주인공인 ’나’를 당신으로 자처하셨기에 사람들은 놀란 나머지 탄복했으나 곧 그들의 눈에 예수는 한낱 목수 요셉의 아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반감에 예수께서 선수(先手)를 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운명이 구약의 엘리야(1열왕 17,7-16)와 엘리사(2열왕 5,1-14)의 처지와 비슷함을 시시하신다.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어 생활고에 허덕이던 많은 과부들을 제쳐두고 시돈 지방의 사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가 돌보았고,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많은 나병환자를 제쳐두고 이스라엘을 찾아온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을 고쳐주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렇게 했던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람’인 예언자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나자렛 사람들도 이와 똑같다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끝나자 사람들의 반감은 화를 동반한 행동으로 전환된다. 사람들은 예수를 동네 밖 산 벼랑으로 끌고 가서 밀어 죽이려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서 스스로 그들을 피해 자신의 길을 가셨다. 메시아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예수께 대한 고향 사람들의 푸대접은 루가복음에서보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에서 더 큰 호소력을 보인다. 루가복음이 예수님의 공생활 개시시점에서 이 대목을 다루고 있는 점에 비해, 마르코와 마태오는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에서 개시한 공생활이 어느 정도 경과한 후에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여 푸대접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마르 6,1-6; 마태 13,53-58) 뿐만 아니라 루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아직 다른 곳에서 활동하신 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23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 서술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복음의 서술이 모순적일수록 저자의 의도를 읽어야 함을 숙제로 생각해야 한다. 루가가 원전(原典)의 순서를 바꾸어 ’나자렛 설교’를 공생활 개시로 선택한 이유를 말이다. 하마터면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갈 뻔했던 나자렛 설교는 루가복음공동체의 초기 상황을 잘 대변하고 있다. 유다인들을 겨냥한 루가의 복음선교가 처음부터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 결과 이방인선교를 염두에 두고 복음을 저술해야 했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나자렛 설교’의 전반부에서 루가 고유의 ’시공개념’을 얻었다. 후반부에서는 예수님의 예언자적 운명을 예감하면서 하느님나라의 복음에 대한 청자(聽者)의 호응과 반감, 열광과 증오가 공존함을 보았다. 오늘은 이 공존의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하겠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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