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야곱의 우물(3월 4 일)매일성서묵상-♣ 知所先後(지소선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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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권수현 | 작성일2005-03-04 | 조회수1,174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그때에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 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는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은 과연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야곱의 우물』《매일성서묵상》에 나오는 3월 4일자 김건일(서울대교구 흑석동 천주교회 )님의 글입니다. *^^* ◆사랑이 모든 것의 근본인가? 세상 사는 이치에서 시작하여 죽고 사는 일까지 본질·본바탕이 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이 말씀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라는 말씀을 모르고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율법학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렇고 내 주변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렇다. 그렇다고 그 모든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듣기가 쉽지 않지만 ‘知所先後 則近道矣 (지소선후 즉근도의)라’, 먼저 하고 나중 할 바를 알면 이는 바로 도(道)에 가까이 가는 것이라 했으니,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라 이웃을, 사물을 절대화하지 않게 되고 이 이치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겸손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내가, 우리가 다른 피조물`-`동물·식물 혹은 광물`-`과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하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생각한 헨리 나웬 신부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지도 못하지도 않은, 그들과 같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겸손의 의미가 아닐까. 우리는 사순절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으면서 시작했다.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할 가장 깊은 이유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제가 당신 창조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죄인인 저에게 관대함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런 기도는 하느님 나라에서 나에게 적절한 자리를 발견 하게 한다. 그래서 율법학자도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아직 알고 있는 것이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배어 있지 않음을 슬퍼할 뿐이다. [영성체후묵상]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을 닮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며 또 하는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축복하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과 땅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권요셉 올림>
그때에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 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는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은 과연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야곱의 우물』《매일성서묵상》에 나오는 3월 4일자 김건일(서울대교구 흑석동 천주교회 )님의 글입니다. *^^* ◆사랑이 모든 것의 근본인가? 세상 사는 이치에서 시작하여 죽고 사는 일까지 본질·본바탕이 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이 말씀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라는 말씀을 모르고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율법학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렇고 내 주변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렇다. 그렇다고 그 모든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듣기가 쉽지 않지만 ‘知所先後 則近道矣 (지소선후 즉근도의)라’, 먼저 하고 나중 할 바를 알면 이는 바로 도(道)에 가까이 가는 것이라 했으니,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라 이웃을, 사물을 절대화하지 않게 되고 이 이치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겸손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내가, 우리가 다른 피조물`-`동물·식물 혹은 광물`-`과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하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생각한 헨리 나웬 신부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지도 못하지도 않은, 그들과 같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겸손의 의미가 아닐까. 우리는 사순절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으면서 시작했다.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할 가장 깊은 이유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제가 당신 창조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죄인인 저에게 관대함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런 기도는 하느님 나라에서 나에게 적절한 자리를 발견 하게 한다. 그래서 율법학자도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아직 알고 있는 것이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배어 있지 않음을 슬퍼할 뿐이다. [영성체후묵상]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을 닮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며 또 하는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축복하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과 땅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권요셉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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