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부활 /이제민
그분은 고통의 세계로 들어오셨다. 죽음의 세계로 들어오셨다. 그분은 너무도 깊이 고통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셨기에 고통과 하나 되셨다. 그러기에 그분의 부활도 '이제 고통 끝'을 선언한 사건이 아니라 고통 안에서만 체험되는 사건이었다.
그분께서 부활하셨기에 더 이상 십자가가 필요 없게 되었다면, 그분이 지고 가신 십자가가 부활을 준비하기 위한 장식물이었다면, 그분께서 부활하셨기에 이제 더 이상 인류는 십자가 아래 꿇어 기도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면,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그분 또한 인류에겐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인류가 그분의 십자가 앞에 꿇어 기도하는 것은 그분이 고통을 벗어나 부활의 영광된 모습 을 우리에게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금만 인내해. 참으면 너도 나처럼 부활하게 될 거야" 하며 고통과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골인점을 향하여 우리를 격려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도 십자가를 지고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셨어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지금 고통을 당하고 계시기에 인류는 여전히 그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셨기에 고통을 뒤로 한 예수가 아니라, 부활하셨어도 우리와 함께 지금 고통을 당하고 계신 예수. 부활하셨어도 당신의 못 박힌 상처를 보여 주시고(요한 20,27), 부활하셨어도 당신의 몸을 쪼개시고 고난의 잔을 마시는 예수(루가 24,30). 이 예수에게서 인류는 참 생명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의 기쁨은 고통을 벗어난 곳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 감추어 있다. 고통을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은, 고통을 없이해달라고만 기도하는 사람은 그래서 부활의 기쁨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잡히시기 전날 기분은 기도하신다. 이 고통의 잔을 거두어달라고. 그러나 이어서 기도하신다. 아니다. 주님, 이 잔을 마시게 해주소서 하고. 부활하시고 나서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그 고통과 죽음의 잔을 들고 그렇게 아버지께 기도하고 계신다. 부활하셨음에도 그분은 여전히 십자가를 지고 계신다.
우리는 많은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 아픔이 하도 커서 고통을 없이 해달라 하느님께 기도한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이제 나의 삶에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없게 된다면 나는 어떤 인간으로 변해 있을까? 아픔이 내게서 완전히 제거된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픔과 고통을 모르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고통을 모르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유토피아에서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십자가가 말해준다. 부활은 결코 유토피아의 삶이 아니라고. 십자가, 그것은 부활의 원천이며 참 삶의 원천이다.
내 몸에서 십자가가 사라지는 날 부활의 참 삶도 내게서 사라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