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새벽을 열며 / 빠다킹신부님의 묵상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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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05-09-08 | 조회수819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2005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제1독서 미가 5,1-4ㄱ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것없으나, 나 대
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 그런 다음 남
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주님의 힘을 입고, 그 주 하느님의 드높은 이름으로 목자 노릇을 하리니, 그의 힘이
땅 끝까지 미쳐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
복음 마태오 1,1-16.18-23
<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았으
며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제라를 낳았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헤스론은 람을,
람은 암미나답을,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라합에게
서 보아즈를 낳았으며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
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르호보암은 아
비야를, 아비야는 아삽을, 아삽은 여호사밧을, 여호사밧은 요람을, 요람은 우찌야를,
우찌야는 요담을, 요담은 아하즈를,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므
나쎄는 아모스를, 아모스는 요시야를 낳았고,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무렵에 요시야는 여고니야와 그의 동생들을 낳았다.
바빌론으로 끌려간 다음 여고니야는 스알디엘을 낳았고 스알디엘은 즈루빠벨을, 즈
루빠벨은 아비훗을, 아비훗은 엘리아킴을, 엘리아킴은 아졸을, 아졸은 사독을, 사독
은 아힘을, 아힘은 엘리훗을, 엘리훗은 엘르아잘을, 엘르아잘은 마딴을, 마딴은 야곱
을 낳았으며,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
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
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
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
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
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
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
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눈이 나빠져서 안경을 쓰게 해 달라는 소원, 키가 커서 맨 뒤의 자리에 앉는
것이 싫어서 키 좀 크지 않게 해달라는 소원, 공부하는 것이 싫어서 공부안하
고도 좋은 성적을 맞게 해달라는 소원, 남 앞에 서면 벌벌 떨고 말을 하지 못
해서 이제 자신감을 갖고서 떨지 않게 해달라는 소원, 신부님이 되게 해달라는
소원, 복권 1등 당첨되어서 우리 집 부자가 되게 해달라는 소원, 옆집 친구보
다 더 많은 장난감을 갖게 해달라는 소원들…….
참으로 많은 소원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소원들을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곤 했
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제가 가지고 있었던 소원들은 저에게 꼭 필요한
소원이라고 생각했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
었지요. 하지만 지금 와서는 그때 왜 그런 소원들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를 바
쳤었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도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즉, 오히려 이
루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소원도 참으로 많이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잠시 앞도 바라보지 못하고, 그 순간에 부족한 것만을 가지고 주님을
귀찮게 했던 것은 아닐까 싶네요.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소원과
꿈을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를 말이지요. 바로 우리 각
자 각자를 위해서입니다. 한치 앞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들이 아닙니
까? 따라서 우리들을 더욱 더 좋은 쪽으로 이끌어주시려는 주님께서는 우리들
의 소원과 꿈을 때로는 과감하게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들은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하고 있고, 또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다고 주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주님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 경위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탄생과정에서
우리들은 서로의 뜻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선 성모님.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갖는다는 것,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
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따지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
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받아들이지요.
다음은 요셉 성인입니다. 요셉 성인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랍니다. 즉, 율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이것을 어기면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
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잉태소식을 듣고서 파혼하기로 결심합
니다. 사실 율법대로 한다면 결혼하기 전에 아기를 가진 성모님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단순히 남몰래 파혼하기로 결심하는 모습,
그 모습은 성모님을 배려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헤아리고 배려하는 마음 때문에,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
을 당신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 자신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들은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살고 있었는지, 그리고 나의 이웃들을 배려하면서 살고 있는지요?
이런 행동들이 바로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내 마음 안에 모시는 행동이
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남의 뜻을 헤아리고 배려하도록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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