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님 저 오늘 여러 잔 했습니다. 이순의
주교님 저녁에 공부하는 아들녀석 모르게 가만히 나가서 치킨도 사고 백세주도 한 병 사서 들어왔습니다.
아들녀석에게 한 잔 받으라고 했더니 이 놈이 장난인 줄 아는 것입니다. 저는 진심인데 아들놈은 장난인 줄 압니다.
세상사 마음을 비우고 살면 편하다는데 세상사 잊고 살면 복이라는데 제 한 몸이라면 비우고도 살고, 잊고도 살겠는데 자식이 있으니 그게 그렇게 어려운거드라구요.
주교님 그래서 오늘은 제 일생에서 제일로 많이 마신 날입니다. 그런데요. 아들놈은 딱 석 잔 받드니 술잔을 엎어버리고 땡이랍니다. 그리고 엄마더러 계속 마시라고.... 제 놈 스트레스 풀어 줄려고 한 잔 마시자고 했드니 뭐라드라.... 가족은 석 잔이요. 내 일은 여섯 잔이요. 나랏 일은 아홉 잔이라나 뭐라나?
주교님 어미가 일생일대의 작심을 하고 자식놈 한테 한 잔 하자고 했는데 이래도 되는겁니까? 그라고 이 에미만 마시게 하드니 제 놈은 골아떨어졌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짱한 정신으로다가 주교님께 연애편지를 쓰는데 자식놈은 잠이나 자고....
주교님. 저도 술 마실 줄 아는데요. 혹시 설운 인생에 주사라도 할까봐서 건강을 핑계삼아 절대로 안마셨습니다. 앞으로도 안 마실 거구요. 그렇지만 오늘은 아들의 하소연이라도 좀 들어 줄려고 마련했는데 일생일대의 어미의 성의를 무시하고 석 잔이루 끝냈습니다요.
주교님 저는 몹시 두렵습니다. 하늘이 준 몫이 버러지 인생인데 남들이 보기에 잘난척 하는 방자한 인간이루 보여져서 훗날에 흉거리가 될까봐서요. 한 치 앞도 못 보는 인생이 무엇이 그렇게 할 말이 많았느냐고 할까봐서 묵상글도 쓰기가 두렵습니다. 저는 그냥 제 사는 그대로를 나열할 뿐인데 읽는 사람들은 그게 아닌가 보드라구요.
질문이 많아요. 그대로만 보아주면 궁금할 것도 이해 못할 것도 없는데 제 각각의 삶에서 수용되는 고정의 관념들을 보태서 이해 시켜 달라고 하시니.... 무지랭이 인생을 무지랭이로 쓰는데 왜 그것이 무지랭이로 안보이는지?
주교님 또 언제 이렇게 마실 날이 있을지 몰라서 써 보았습니다. 그런데요. 주교님! 저는 이렇게 주교님께 편지를 쓸 수 있는데 날 밝으면 또 사람들은 이 아무개가 주교님께 주정했다고 할까요?! 그렇지만 저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아들녀석이 겁이나고 걱정이 되었는지 마시기를 중단하는 바람에 백세주 한 병을 다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둘이 나눠 마셨으니 저는 절대루 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목적한 아들의 답답증은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놈은 석 잔 받고 술잔을 엎더니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네 속을 엄마가 좀 알고 싶은데 죽어도 입은 열지 않을 것 같고... 너가 할 것은 딱 한가지 뿐이다.> 그랬더니 이놈 왈! <신부님?>
주교님 이놈이 도대체 뭐가 될거 같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 오면서 절대로 모를 것이 딱 하나가 있는데요. 신부님들 속이거든요. 저는 신부님들 속은 절대로 모르겠드라구요. 교우들은 신부님들 속을 안다는데 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모를 것이 신부님들 속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밤에 아들의 속을 좀 알아주려고 했드니 절대루 모르것네요. 주교님께서 제 아들의 속을 좀 알아봐 주실래요? 결국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술만 마신거네요. 주교님 저 오늘 여러 잔 했습니다. 그래도 되지요?! 불혹을 넘고 지천명을 바라보도록 이런일 없었으니 봐 주세요. 예수님도 봐 주실건데... 주교님도 봐 주세요. 히~!
해 보니께 어미 된다는 것이 겁나게 어려운 것이드라구요.
2005/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