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인 정의배 마르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서울 창동에서 태어난 성 정의배 마르코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양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곧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1845년 3대 조선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로는 서울지역의 회장직을
맡아 순교할 때까지 20여 년을 헌신적으로 일했다. 또 1854년 성영회(聖嬰會)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1866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의 체포를 시작으로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
지역의 회장으로 명망이 높은 정의배는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체포되어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그리고 그의 제자 우세영 알렉시오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성인 우세영 알렉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일병 '세필'로도 불리는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황해도 서흥 향교골에서 출생했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요한이라는 회장의 권유로 관직의
뜻을 버리고 상경하여 정의배 마르코에게 교리를 배운 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
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후 부모의 반대와 박해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
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2월 16일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첨례를 보다가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의 혹형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석방되자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상경하여 스승 정의배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체포된 정의배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스승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성인 다블뤼 안또니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순교자 비망기」
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
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
는테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예수 수난 축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 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샷)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성인 위앵 루까,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 성은 민(閔),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랑스 '랑그르'교구 출신인 민 신부는 1861년 사제가 된 후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착지인 충청도 내포에 머물면서 안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안 주교의 지시로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악형을 겪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형장이 충청도 수영으로 결정되어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3월 30일
수영에 도착, 그곳 ‘갈매못’에서 당일로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성인 오매뜨르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성은 오(吳),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교구 출신인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
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성인 장주기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일명 '낙소'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 (현재,경기도
화성군 양감련 육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
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
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사하라 사막 ▒
인생이란,
특히 변화의 시기에 있어서
인생이란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끝은 보이질 않고, 길을 잃기도 하며,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신기루를 좇기도 한다.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동안에는 언제 건너편에 다다를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인생도 많은 부분이 그 모습과 닮았다.
- 스티브 도나휴의《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중에서 -
누구나 자기 인생에 한번쯤은
사하라 사막을 건널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과 용기, 잘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열심히 걸어가다 보면
어느덧 사하라 사막은 사라지고
기적처럼 오아시스를 만나게 됩니다.
- 오늘 고도원의 아침편지입니다 -
소스입니다.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인 정의배 마르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서울 창동에서 태어난 성 정의배 마르코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양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곧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1845년 3대 조선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로는 서울지역의 회장직을
맡아 순교할 때까지 20여 년을 헌신적으로 일했다. 또 1854년 성영회(聖嬰會)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1866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의 체포를 시작으로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
지역의 회장으로 명망이 높은 정의배는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체포되어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그리고 그의 제자 우세영 알렉시오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성인 우세영 알렉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일병 '세필'로도 불리는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황해도 서흥 향교골에서 출생했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요한이라는 회장의 권유로 관직의
뜻을 버리고 상경하여 정의배 마르코에게 교리를 배운 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
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후 부모의 반대와 박해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
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2월 16일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첨례를 보다가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의 혹형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석방되자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상경하여 스승 정의배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체포된 정의배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스승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성인 다블뤼 안또니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순교자 비망기」
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
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
는테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예수 수난 축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 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샷)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성인 위앵 루까,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 성은 민(閔),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랑스 '랑그르'교구 출신인 민 신부는 1861년 사제가 된 후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착지인 충청도 내포에 머물면서 안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안 주교의 지시로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악형을 겪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형장이 충청도 수영으로 결정되어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3월 30일
수영에 도착, 그곳 ‘갈매못’에서 당일로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성인 오매뜨르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성은 오(吳),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교구 출신인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
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성인 장주기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일명 '낙소'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 (현재,경기도
화성군 양감련 육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
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
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사하라 사막 ▒
인생이란,
특히 변화의 시기에 있어서
인생이란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끝은 보이질 않고, 길을 잃기도 하며,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신기루를 좇기도 한다.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동안에는 언제 건너편에 다다를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인생도 많은 부분이 그 모습과 닮았다.
- 스티브 도나휴의《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중에서 -
누구나 자기 인생에 한번쯤은
사하라 사막을 건널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과 용기, 잘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열심히 걸어가다 보면
어느덧 사하라 사막은 사라지고
기적처럼 오아시스를 만나게 됩니다.
- 오늘 고도원의 아침편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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